[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86)전화를 발명한 사람들-그레이(하)

전화를 이야기할 때 늘 조연으로 출연하는 사람이 있다.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

 그레이는 언제나 전화를 발명한 벨을 빛나게 하는 조연으로 등장한다. 벨보다 결코 뒤처지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 차이로 인해 그레이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거론되는 전화발명에 대한 이야기 중에 불행한 조연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1835년 오하이오의 바른스빌에서 태어난 그레이는 1873년 발명된 전신기와 함께 성장했다. 때문에 그레이도 전신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누구보다도 일찍 전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레이는 전신중계기로 첫번째 특허를 취득했다. 나이 32세 때의 일이다.

 첫번째 특허취득은 그레이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특허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확인할 수 있었고,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레이는 확신에 차서 자신이 개발한 전신장비들을 생산하기 위해 웨스턴일렉트릭매뉴팩처링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 때 그레이가 세운 웨스턴일렉트릭을 주의깊게 지켜보는 회사가 있었다. 당시 전신분야를 독점운영하고 있던 거대 전신회사인 웨스턴유니언이었다. 웨스턴유니언은 전신분야의 지배권을 완벽하게 행사하려고 1872년에 그레이가 세운 웨스턴일렉트릭의 주식 3분의 1을 매입했다. 그레이의 특허권이 욕심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 때 그레이는 돈뿐만이 아니라 웨스턴유니언과 협력해 다중전신시스템을 발명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어 그레이는 직업적 발명가의 길로 접어들었고, 그에게 지워졌던 짐이 이후 벨과의 전화발명과정에서 패배의 길로 빠져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37년에 전신이 발명된 이래, 1872년에는 이중시스템이 출현했고 당시 전신업계에서는 다중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수많은 신호를 동시에 전달할 수 있는 다중시스템을 발명하는 사람이 부와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에 그레이가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레이는 다중전신기를 연구하면서 전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1874년 어느날 그레이는 사촌동생의 집에 놀러갔는데 그곳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전기실험 애호가였던 사촌동생은 화장실 욕조에 두개의 회로로 구성된 전기장치를 설치해 실험을 즐기고 있었다. 한 회로의 전지가 금속판에 진동을 발생시키면 그것이 소음을 내면서 유도코일이 설치된 다른 회로를 열거나 닫았다. 그레이는 진동전류의 상업적 가능성에 주목한 후, 신호의 전송과 재생에 관한 실험에 착수했고 그 과정에서 전화의 가능성을 착안했다.

 그레이는 자신의 ‘욕조실험’을 개량해 실험한 결과, 선을 통해 상이한 음조들을 보내고 반대편에서 그것들을 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그는 초기형 전자오르간을 발명한 셈이었다. 그는 ‘음악전신’을 통해 그 아이디어를 두갈래길 중 한쪽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하나의 선을 통해 많은 신호를 전달하는 데 각각의 음조를 이용하거나, 혹은 말을 전달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 중의 하나 말이다.

 이 발명의 의의는 대중에게 명확히 전달되었으며, 대중은 전화라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워싱턴·보스턴·뉴욕에서 그의 송수신기에 대한 설명회가 열렸으며, ‘뉴욕타임스’는 웨스턴유니언 직원의 말을 이렇게 인용해 보도했다. “전신교환원들은 곧 라인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송할 것이며, 전신을 보내는 대신 서로 말을 주고 받을 것이다.”

 그러나 민간업계는 그렇게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업계의 최고 권위의 기술잡지였던 ‘더 텔레그래피’는 말을 전송하는 것이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믿고 그 아이디어를 폄하했다. 그것은 전화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것을 “직접 적용할 실제적인 용도도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레이의 동료들조차 무덤덤했다. 그의 특허 변호사는 그에게 전화라는 것이 당시에는 과학적으로 신기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한 가혹한 비판과 사업 파트너들의 조언 때문에 그레이는 전화가 돈이 되는 사업일 것이라는 생각을 포기하고 다중전신의 개발에 전념했다. 그는 유선송화구로 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벨보다 먼저 도달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접어버렸다. 그는 사업가들이 말보다는 메시지 전송을 더 유용하게 이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이 그가 뒤늦게 후회한 결정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875년 가을에 그레이는 좀 무성의하게나마 전화를 발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결정적인 요소를 발견했다. 그는 두명의 어린아이가 실과 두개의 깡통으로 이뤄진 장난감 전화기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 한 소년이 한쪽 깡통에 대고 말하면, 이것에 의해 발생하는 금속의 진동이 실을 통해 다른쪽 깡통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찾고 있던 해답이었다. 그는 이미 매우 훌륭한 수신기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없었던 것은 적절한 음성송신기였다. 깡통은 천재성이 번득이는 아이디어였다. 그는 깡통처럼 생긴 음성장치를 선에 연결해 음성송신기를 스케치했다. 선이 전도성 액체에 부착되었고, 선에 의해 전달될 수 있는 전기적 신호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화의 유용성에 대해 회의하면서 그 아이디어에 대한 특허신청을 지연시켰다.

 그레이는 1876년 2월 11일까지 두달이나 미루다가 벨의 전화발명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부랴부랴 자신의 아이디어를 서류로 작성해 특허신청서에 적었다. 그레이가 특허를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호하고자 최종적으로 결정했을 때, 1876년 2월 14일 그의 도안은 벨의 특허신청서보다 두시간이나 늦게 특허사무소에 도착했다.

 발명 우선권에 관한 논쟁이 충분히 있을 법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매우 쉽게 마무리되었다. 그레이는 전화가 큰 상업적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전화의 특허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는 정반대였다. 전화는 당시 인간이 발명한 그 어떤 발명품보다도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1877년 웨스턴유니언은 180도 방향을 바꿔, 1876년 거래를 제안받았던 전화에 대한 특허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벨의 팔을 비틀어 빼앗아 오려고 했다. 이 때 이용당한 것이 그레이였다.

 웨스턴유니언은 그레이에게 거액의 소송비용을 대주었다. 모든 사람이 그레이가 유능하고 근면한 과학자이고 벨과 같은 결론에 별도로 도달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아무리 많은 시비도 벨이 특허자격이 없다는 것을 법원에 확신시킬 수 없었다. 긴 법정투쟁 끝에 벨과 그레이는 법정 밖에서 화해했다.

 결국 벨은 전화 발명가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된 반면, 그레이는 전신시스템과 관련된 몇몇 부속장치를 개발하는 데 그쳤다. 그레이가 상업적 가치를 중시해 전신시스템을 개량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인간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많았던 벨은 전화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모든 정열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벨과 그레이 사이의 전투에서는 모험적 기업가와 실무형 사업가 사이의 태도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신의 사업 파트너가 설정한 템포를 따라간 그레이에게 전화는 신기하지만 성가신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혼자 일하는 아마추어였던 벨에게 전화는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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