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형 공장]`굴뚝` 없앤 `디지털 마천루`

우리나라는 인구에 비해 땅이 턱없이 부족하다. 좁은 국토에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모든 건축물은 끝없이 위로만 솟구친다. 도심지의 높은 땅값을 상회하는 수익성을 내려면 건물을 층층이 포개서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인의 절반 이상이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무용 빌딩과 상가건물도 자꾸만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고층화, 과밀화되는 건축환경은 21세기 한국인에게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최근엔 제조업체의 공장건물까지 하늘로 치솟는 키높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고층아파트처럼 높게 지어올린 공장. 이른바 아파트형 공장이 전국각지에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형 공장은 불과 몇년새 수도권 공단지역의 외형을 마치 거대한 고급 아파트촌처럼 바꿔놓고 있다. 심한 먼지와 소음, 쉴새없이 굴뚝연기를 내뿜던 재래식 공장들은 점차 사라지고 깔끔한 미래형 아파트공장이 그 자리를 대신 메우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건설 중이거나 완공된 아파트형 공장은 총 110개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연평균 10∼15개씩 추가 신축을 예상하고 있다. 아파트형 공장에 둥지를 튼 기업체 수도 내년에는 7000개를 훌쩍 넘어설 전망이다. 소재지도 서울 구로구 디지털산업단지가 주류를 이뤘으나 올들어 안양·성남·군포 등 수도권 인근의 공단지역과 지방 대도시로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중소건설업체가 주도했던 아파트형공장 건축시장에 삼성물산, 현대산업개발 등 대형 건설업체들의 신규참여가 러시를 이루고 있다. 올들어 아파트형 공장분양률이 평균 80∼90%를 넘어 수익성을 검증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 대신 은행권이 직접 건설비용을 지원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형태의 아파트형 공장사업도 줄을 잇고 있다.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하는 기업체 성격도 초기 정보통신 위주에서 생명공학, 문화콘텐츠 등으로 다양화하면서 잠재 수요층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그야말로 아파트형 공장이 부동산시장에서 잘 나가는 니치상품으로 뜨는데 성공한 것이다.

 현재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아파트형 공장 붐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우리나라의 제조업 환경은 어떤 형태로 변할까. 약 30년 후에는 국내 제조업체의 절반이 고층화된 임대형 공장에 입주할지도 모를 일이다. 도심지 가까운 지역에 아파트형 공장건물이 들어서는 것은 단순히 개별 입주업체의 근로환경이 개선되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일단 공단가에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서면 우중충한 공단특유의 거리 분위기부터 달라진다. 첨단설계로 이뤄진 고층공장들은 인근지역의 많은 유동인구를 덤으로 끌어들인다. 아파트형 공장을 중심으로 각종 대형할인매장과 공원, 서비스업체 등 생활 근린시설이 모여들고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근로자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붐비는 상공업지역으로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굴뚝형 제조업이 첨단 제조벤처기업으로 교체되면서 지역환경이 놀랍도록 개선된 것이다. 실제로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선 구로·영등포·안산지역 공단들은 굴뚝 공장을 밀어내면서 새로운 첨단산업을 유치하는 것과 함께 자체 주거시설 및 도로인프라 등 환경개선 사업을 진행시켜 탈공단화를 추구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에는 상상하기 힘든 변화다.

 한국 제조업계의 작업환경을 바꾸는 아파트형 공장의 인기는 공장건물에도 쾌적함과 품격까지 원하는 신세대 근로자의 욕구, 90년대 이후 산업구조와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이는 비록 물건을 만들지만 예전의 공장분위기는 싫다는 기업주의 달라진 의식구조를 상징한다.

 작업공간의 변화는 노동자의 의식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아파트형 공장은 예전에 분리돼 있던 사무공간과 생산라인을 하나로 포용한다는 점에서 회사안에서 관리직과 노동직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즉 아파트형 공장 안에서 뒤섞여 일하다 보면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하는 기업체 종사자들은 스스로 전통적인 블루칼라, 노동자계층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이같은 현상은 아파트형 공장에서 입주하는 기업체들의 성격과도 관계가 있다.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한 업체들은 대부분 전형적인 굴뚝산업이 아니라 정보통신·전자부품·바이오 등 이른바 첨단업종이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 들어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이 기술집약적인 첨단산업쪽으로 쏠리면서 주요 공단지역에선 공동화현상이 있어났다. 이 진공상태를 헤집고 들어온 IT제조업체들이 앞다퉈 둥지를 튼 곳이 아파트형 공장이다.

 이미 아파트형 공장은 국내 IT업체들의 주된 작업공간으로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이미 완공된 전국의 90여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한 업체의 절반 이상은 정보통신·전자부품 관련회사들이다. 아파트형 공장은 험한 파고를 넘는 국내 IT산업의 인큐베이터로 새롭게 평가될 만한다.

 싸고 저렴한 분양가와 유사업종이 모여 기대되는 시너지 효과 외에도 첨단벤처업종을 아파트형 공장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은 많다. 공장 주위로 잘 닦인 산업도로, 국철 및 지하철망과 공단조성에 따른 집적화 등 일할 맛 나는 쾌적한 근무환경은 벤처업체들의 아파트형 공장 입주를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형 공장이 갖는 장점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대도시를 떠나기 싫어하는 고급인력을 유치하고 산업공동화를 막는데 있어 아파트형 공장은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한다. 기존 공단지역에서 골칫거리인 주차문제도 건물당 400∼500대씩 제공되는 주차공간으로 대부분 해결된다.

 요즘 아파트형 공장 사양이 갈수록 고급화되면서 건물마다 초고속 인터넷, 근거리통신망, 영상회의시스템, 케이블TV 등 첨단통신설비는 물론 육아시설까지 제공하는 사례도 있다. 무거운 생산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아파트형 공장을 무조건 튼튼한 구조로 짓던 시절은 지나갔다.

 우수한 환기시설과 자연채광. 화물과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분리설치하고 쾌적한 환경조성을 위해 최고급 자재로 마감하고 건물주위에는 개방된 휴식공간도 설치한다. 공장과 아파트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고급화된 한국식 아파트형 공장은 이미 세계적으로 독특한 건축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도시국가로서 좁은 땅 때문에 아파트형 공장의 역사가 우리보다 앞선 홍콩·싱가포르에도 이처럼 첨단화된 공장시설은 없다.

 중국·북한의 고위관료들도 한국경제를 시찰할 때 어김없이 아파트형 공장촌을 방문한다. 이미 아파트형 공장은 고도화된 한국제조업의 대표적 상징물로 부상한 것이다. 오죽하면 일전의 북측 시찰단이 개성에도 아파트형 공장을 지어달라고 부탁했을까.

 물론 아파트형 공장에 대해 찬성의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단지역의 주거환경개선을 요구하는 일부 주민들은 차라리 용도변경을 통해 공장건물 대신 일반 아파트를 짓게 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한다. 아파트형 공장 신축이 서울 도심지에 집중돼 수도권 과밀화를 부추긴다는 비난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근로자들은 밤이면 아파트에서 잠을 자고 해가 뜨면 아파트형 공장으로 몰려가는 생활패턴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향후 이같은 추세는 산업계 전반으로 더욱 확산될 전망이다. 한국인에게 아파트형 공장은 단순히 높게 지은 공장건물이 아니다. 수많은 중소벤처기업에 둥지를 제공하고 끊임없는 자양분을 주는 인큐베이터. 첨단지식산업의 산파역할을 아파트형 공장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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