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진정으로 정보기술(IT)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본 IT분야 최고 석학으로 통하는 도쿄대학 정보학부 사카무라 겐(坂村 健) 교수(51)의 첫마디는 의외였다. IT 관련분야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1946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에니악)를 탄생시킨 후 중대형 컴퓨터, 개인용컴퓨터(PC) 관련산업을 이끌었던 곳도 바로 미국이 아닌가.
IT분야에서 미국의 리더십은 90년대 후반 들어서면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2000년 후반부터 미국에 인터넷거품이 사라지면서 전세계 IT업계는 사상 최악의 불황을 맞고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시아 각국은 어떠한 교훈을 배워야 하나.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모델(원제:정보문명의 일본모델)’이라는 책의 베스트셀러 저자로 유명한 사카무라 겐 교수와 특별대담을 가졌다.
―최근 한국에도 번역된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모델’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 데 기분이 어떠신지요.
▲물론입니다. 정말 기분좋은 일입니다. 일본이 앞으로 어떻게 차세대를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일본론, 그리고 아시아 각국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아시아론 등이 한국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어 더할나위 없이 기쁩니다. 일본, 중국, 한국 등은 엄연히 다른 나라이고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지만 역시 아시아 민족으로서 공통점도 많습니다. 특히 나의 저서가 한국 독자들에게 미국 흉내내기를 벗어나 한국식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된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IT불황을 겪고 있는데 그 원인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IT는 기술발전이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기술과 관계없이 투자자들이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IT가 기술발전보다 투기대상이 돼버렸습니다. 투기 대상으로 전락한 IT는 기술 자체, 즉 알맹이가 없어져버립니다. 이는 90년대부터 계속된 일본의 땅값 거품(버블)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건설업체가 일반인에게 돈을 빌려주며 건물을 지으면 무조건 돈이 될 것처럼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투기용 건물이 늘어난 만큼 수요가 따라줄 리 없었고 버블은 곧 사라졌습니다. 건설업체가 통신기기나 컴퓨터 메이커, 부동산이 통신설비나 서버에 해당한다고 보면 결국 같은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모델’에서는 인터넷, 그 중에서도 전자상거래 등의 분야에서 그릇된 환상을 심어줬던 점이 많았다고 지적했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무엇이 될까요.
▲일본에 유명한 술도가로 ‘아키다’가 있습니다. 지방에 가면 꽤 알려져 있지요. 이 술이 최근 인터넷을 통해 도쿄에서도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자상거래가 새로운 시장을 만든 것처럼 떠들었습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한 대목은 아키다가 도쿄에서 팔린다고 해서 술 전체 판매액 자체가 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전자상거래라는 새로운 유통경로가 생겼다고 해서 술 시장 자체가 커지지는 않습니다. 도쿄에 있는 누군가는 술 판매량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또 인터넷으로 피자를 주문한다고 해도 화면에서 피자가 튀어나올 리 만무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인데 당시에는 경제 전문가조차 IT에 의한 ‘신경제(뉴이코노미)’라는 등 당치 않은 마법을 믿어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IT불황으로 아시아 지역 국가, 특히 IT수출 비중이 높은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한국 등이 미국 이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IT버블은 말 그대로 거품이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가장 돈을 많이 챙긴 사람은 실체 없는 거품장사를 한 사람들입니다. 투자컨설팅회사와 주식투자자들이 첫번째로 챙겼고 다음으로 깜짝 아이디어로 회사를 세워 나스닥 등에 등록시킨 뒤 회사를 팔아치운 ‘젊은 기업가’들이 나머지를 챙겼습니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밑에 있던 것이 실제로 손을 움직여서 IT기기를 만들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다지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아시아를 비교해보면 미국이 챙긴 쪽이고 아시아는 만드는 공장쪽에 가깝습니다. 버블이 꺼질 때 타격을 받는 것은 그 역순이기 때문에 우선 아시아부터 불황의 역습을 당하게 된 셈입니다.
―교수님은 IT분야에서 사실상 표준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을 추종할 것이 아니라 일본이 독자모델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식 모델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본식 독자모델은 이동전화나 가전기기 등 PC가 아닌 기기를 중심으로 한 정보화, 네트워크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PC는 범용으로 무엇이든 가능한 마법상자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사용하기 불편한 측면도 있습니다. 가령 음악을 듣는다면 PC보다 오디오가 낫고 또 PC에 팩스기능이 있다고 해도 곧바로 사용하기엔 팩스가 빠릅니다. 이런 사용이 편한 특화된 전용기기를 네트워크에 연결시켜 사용하면 더욱 편리할 것입니다. 바로 유비쿼터스 컴퓨팅이지요. 이런 모델은 84년 내가 제창한 트론이 세계 최초였지만 이제는 차세대 컴퓨팅 모델로 세계 어디서나 연구되고 있는 분야입니다.
―교수님이 약 20년 동안 매달렸던 모바일(이동) 운용체계, 즉 트론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내용과 그동안의 성과는 무엇인지요.
▲트론은 기술적으로는 리얼타임OS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리얼타임OS 분야에서 트론은 압도적인 세계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동전화단말기, 디지털카메라, 자동차의 엔진제어, VCR, 팩스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도요타자동차, 도코모 등의 표준 OS이기도 합니다.
―교수님이 주장하고 있는 IT혁명의 아시아적 모델이 일본보다 경제규모가 적은 한국 및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한국 IT업체들은 어떤 분야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가전기기가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역시 유비쿼터스 컴퓨팅 분야가 유망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본과 똑같은 분야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추진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는 일본이 미국 흉내내기를 해선 안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물론 한국도 미국의 따라하기에 빠져선 안되지요. 성공의 열쇠는 한국의 독자적인 것, 한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분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온라인게임’이나 ‘PC방’ 등이 그런 예가 될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특히 온라인게임은 ‘무엇이든 빨리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사람들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IT정책은 미국 따라잡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 보급확대 및 통신시장 자유화 정책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는지, 그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지요.
▲나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서울은 아파트 등 집합주택이 많고 지하의 공동공간을 서버 설치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등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이 많습니다. 할 수 있을 때 인프라를 구축해 놓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아쉬운 것으로는 ‘PC를 이용한 초고속인터넷 보급 지상주의’가 돼버렸다는 점입니다. 네트워크 콘텐츠 제공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돈을 버는 모델을 만든 것이 일본의 인터넷 휴대전화라고 얘기되고 있는데 한국으로서는 유료 콘텐츠 모델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린 점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또 급격하게 정보기반 시설을 구축하려다 보니 미국 등 외국 제품들이 시장을 독차지해버린 감이 있습니다. 너무 빠른 진전속도 때문에 한국에서는 시스코와 같은 라우터 업체와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같은 중형컴퓨터 업체를 키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휴대폰 보급이 늘어나면서 이동통신이 IT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 PDA 등 다양한 모바일(이동)기기들이 새로운 IT제품군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요. 미래 IT산업 지도는 어떻게 그려질 것으로 보십니까. 또 이때를 대비해 한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지금 어떤 IT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기본적으로 미래 IT기술은 ‘다양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가의 IT발전 전략도 자기 나라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분야를 찾아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나가면서 한편으론 다른 나라의 것들이라도 좋은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의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것은 이미 미국조차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본의 경우 VHS, MD 등 나름대로 일본이 주도한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도 한국이 세계를 상대로 발신하는 분야를 만들어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흉내내기와 따라하기는 금물입니다.
■사카무라 겐 교수는 누구인가 ■
게이오대학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했다. 현재는 도쿄대학 정보학부 교수로 후학을 지도하는 일외에 ‘YRP유비쿼터스네트워크연구소장’으로 이동컴퓨팅 관련 기술개발에 전념하고 있다.
사카무라 교수가 84년부터 수행하고 있는 트론(TRON) 프로젝트는 임베디드(내장형) 운용체계를 개발하는 사업으로, 최근 세계에서 가장 유력한 유비쿼터스 컴퓨팅을 위한 OS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에서 만든 휴대폰과 디지털카메라 등에 쓰이는 MPU는 대부분 트론을 사용할 정도다.
사카무라 교수는 또 트론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내 IMT2000을 이끄는 등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두뇌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해 ‘개방형 컴퓨터의 기본 소프트웨어 개발의 모델 제창 및 실천’의 공로로 다케다(武田)상을 수상했다. 또 지난 99년부터는 미국전기전자학회(IEEE)의 학술지인 ‘마이크로(Micro)’ 편집장을 맡는 등 학회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잇다.
<주요 경력>△74년 게이오대학 공학부 전기공학과 졸업 △79년 박사과정 수료 공학박사 △79년 도쿄대 이학부 정보과학과 강사 △88년 미국 전기전자학회(IEEE) 최우수논문상(MICRO 부문) △96년 도쿄대 교수 △97년 정보처리학회 최우수 저술상
■베스트셀러 저자로도 맹활약 ■
사카무라 겐 교수는 최근 컴퓨터 및 유비쿼터스, IT정책 등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20여권의 저서를 잇따라 펴내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중 ‘통쾌! 컴퓨터학’은 판매부수가 20만부를 넘는 등 전문서적으로서는 드문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 3월과 6월에 출판된 ‘21세기 일본의 정보전략’과 ‘유비쿼터스 컴퓨팅 혁명’ 등도 최근 각각 10만부 판매를 돌파해 IT분야 베스트셀러 자리를 예약했다.
또 최근 국내에도 번역된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모델(원제:정보문명의 일본모델)·사진’은 사카무라 교수의 평소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저서라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IT버블 붕괴에서 배울 점’ ‘일본이 왜 여기까지 왔나’ 등의 소주제를 통해 일본 고유의 문화, 교육문제를 포함한 IT전략론이 독자들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준다.
최근 저서인 ‘21세기 일본의 정보전략·사진’도 ‘차세대 IT혁명과 아시아적 발전모델’에 이어 올해 안에 번역돼 국내 독자들을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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