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20주년특집>새로운 20년-원칙과 기본

 ■유리알 경영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바로 서야 ■

 올해로 설립 20년째를 맞는 가구전문업체 퍼시스(회장 손동창). 사람 나이로 치면 약관도 채 안된 지난해 퍼시스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산하 경제정의연구소가 선정한 경제정의기업상 대상을 수상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사양산업처럼 비치고 있는 전통 제조업 분야에서, 그것도 타 업종의 대기업들을 제치고 시민단체가 수여한 최고기업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경제정의연구소(이사장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는 선정배경으로 ‘정도경영’과 ‘투명경영’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단지 외형적인 모양새만이 아니다. 퍼시스는 재무건전성, 소비자보호, 종업원만족도, 배당성향, 노동생산성증가율, 연구개발, 특허 등 제반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기업의 본원적 목적인 영리추구에 충실하면서도 성장성과 사회환원 노력, 원만한 노사관계, 주주권익 옹호 등 기업의 덕목을 고루 갖춘 결과였다.

 눈여겨볼 대목은 경실련 경제정의기업상 평가지수(KEJI)와 한국신용평가정보 신용평가지수(KIS)에 통계적으로 일정한 상관관계가 존재했다는 점.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기업이 경제적으로도 믿을만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새로운 밀레니엄, 새로운 20년을 준비하는 우리 기업들에 다시금 ‘기본과 원칙’이 강조되고 있다. 지난 수년 전부터 회자되기 시작한 윤리경영이나 경제정의, 선진적 기업지배구조 등은 새삼스런 경영철학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성장제일주의 신화속에 잊고 살았을 뿐, 기업경영의 초심을 찾자는 시류들이다.

 기업경영의 기본 중의 기본은 바로 회계의 정직성이다. 특히 투명경영의 스탠더드로 여겨지던 미국 선진기업들마저 각종 회계부정 사태에 휘말리면서 회계의 정직성은 전세계적인 과제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말 파산신청한 엔론에 이어 미국 2위의 장거리 전화업체 월드컴, 사무기기업체 제록스 등으로 불똥이 튀었다. 믿지 못할 회계부정 사태 여파로 미국 증시는 폭락하고 파장은 전세계 증시로 번져갔다. 기업의 주인인 주주가 경영자들을 믿지 못하면서 빚어진 엄청난 결과인 것이다.

 최근 독일 지멘스그룹 하인리히 폰 피어러 회장은 “지금 미국경제의 위기는 분식회계가 발단이며, 투명한 회계시스템을 갖춰 윤리경영으로 돌아가야 주식시장에서도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IMF사태 이후 나아지긴 했지만 일부 기업의 경영자들은 실적과 무관하게 자료를 조작할 수 있다고 믿었고, 회계사 등 감사인들도 암묵적인 공범역을 맡았다. IMF 당시 22조원 규모의 회계부정 사건을 일으킨 대우그룹이 대표적 사례다. 이어 강화된 회계기준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만도 흥창·신화실업 등 13개사가 부정회계로 제재를 당했다.

 김광윤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계투명성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회계일 뿐”이라며 “경영자들은 분식회계나 회계조작이 곧 범죄행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99년 삼성경제연구소는 21세기 기업경영환경을 예측하면서 7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연구소는 역시 변하지 않을 경영원칙으로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태풍의 핵에 비유, 환경변화가 극심할수록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며 중심을 잃을 때 변화에 휩쓸려 도태되고 만다고 지적했다. 기업에는 창업정신 등 결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고,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성공의 근원이라고 했다.

 김성수 경희대 교수는 최근 외부 기고문을 통해 ‘기업은 인재다’라는 논지를 펴고, 기업이 지녀야 할 기본과 원칙을 신 인재가 갖춰야 할 10가지 덕목으로 제시한 바 있다. 할 수 있다는 신념과 긍정적 사고, 정직과 청렴성, 사람에 대한 존중, 도전성, 근검절약주의, 신속한 정보판단력과 문제해결력, 신용제일주의 정신, 전문성과 신지식, 창의력, 건강 등이 그것이다.

 결국 사람이 모여 기업을 이루고, 신 인재는 곧 신 기업으로 이어지므로 개인이나 기업 모두에 통용될만한 요건인 셈이다. 특히 신념, 정직과 청렴성, 도전성, 근검절약주의, 신용제일주의는 고인이 된 삼성 이병철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교보 신용호 회장, 아남 김향수 회장 등이 지금의 한국 경제를 일궈낸 창업정신이었다고 김 교수는 평가한다.

 또 하나, 실패는 언제나 겪을 수 있으나 실패의 경험을 통해 원칙과 기본을 되찾는 교훈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른바 실패에 대한 학습론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학습국가를 향한 실천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반복하고 있는 실패를 벗어나고 질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은 물론, 기업과 국가 전체의 학습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미래 정보사회에서 지식공유 기반이 강조되는 것은 이처럼 실패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기고:일류기업으로 가는길-이승철 전경련 지식경제센터 소장(사진) ■

1000년 전 고려는 다양한 세계적 명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상품이 고려청자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도자기가 세계 일등 상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중국도 화약이나 종이 등 많은 발명을 일궈낸 국가였지만 지금 관련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은 다른 선진국이 갖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간단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동양은 활의 문화다.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좋은 활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활을 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활을 잘 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심지어는 눈을 감고 쏘아도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신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활을 쏘는 기술은 대단히 아날로그적이고 암묵지적인 노하우다. 따라서 숫자로 디지털화하거나 문자로 형식화해 기록하기 어렵다. 만약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제자를 양성하지 않고 죽으면 그 기술은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반면 서양은 총의 문화다. 총을 잘 쏘기 위해서는 총을 쏘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좋은 총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단 좋은 총이 만들어지면 총을 잘 쏘는 것은 매우 쉽다. 누구든지 정조준해서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은 과녁에 명중한다. 좋은 총을 만드는 기술은 설계도라는 형식지를 통해서 기록, 보존된다. 따라서 좋은 총을 만드는 사람이 죽어도 설계도는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총 제조기술은 꾸준히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아날로그 형식의 암묵지적인 기술을 사람의 두뇌에 보관하는 문화에 익숙해있다. 이에 비해 서양은 디지털 방식의 형식지적인 기술을 매뉴얼로 기록하는 문화에 친숙하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는 과거 동양의 앞선 기술이 단절된 반면, 서양은 전수받은 기술들을 계승 발전시켜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현실을 설명해준다. 이런 해석은 비록 활과 총에 단순화시킨 사례지만 오늘날 사회를 설명하는 데도 시사점을 던진다. 기업경영, 시민생활, 정부정책 등 사회전반의 문제로도 귀결된다는 뜻이다.

 우선 기업경영부터 살펴보자. 무엇보다 국내 기업경영 관행에서는 디지털화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업무 매뉴얼이 제대로 갖춰져 후임자에게 전해지거나 회사의 각종 문서나 노하우가 체계적으로 관리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단적인 사례다. 한국 기업에서는 연봉제가 잘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도 디지털 사고방식의 성과평가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직책과 업무의 중요도, 달성된 성과의 수준, 업무에 투입된 비용 등 평가요소에 대한 디지털 측정기술이 부족하다. 기업 내에서 이뤄지는 많은 활동을 화폐가치로 계량화해 본 경험이 없는 상황에서 각종 성과를 산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최근 기업마다 전사적자원관리(ERP)의 도입이 확산되면서 어느정도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우리네 시민생활은 기업경영보다 더욱 뒤져 있다. 거리에서 길을 물어보면 상당수 사람들은 ‘저쪽으로 조금 가다가, 이쪽으로 한참 가다보면 있습니다’는 식의 애매한 표현을 쓴다. 저쪽과 이쪽은 어느 쪽이며, 조금과 한참은 도대체 어느 정도인가. 교통 안내방송에서 자주 쓰이는 ‘차간거리가 촘촘하다’ ‘지체와 서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표현이 교통체증의 정도를 얼마나 판단해줄 수 있는가. ‘갖은 양념을 넣어라’는 식의 표현으로 요리법이 전달되는가. 한마디로 우리의 일상적 사고에는 과학적·통계적 데이터에 기초한 디지털 방식보다는 애매하고 모호한 인식체계가 만연해 있는 것이다.

 정부정책 수립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선행돼야 할 고려대상은 정책효과에 대한 과학적 분석, 즉 비용과 편익에 대한 디지털 방식의 측정이다. 의약분업의 의약품 오남용 방지효과, 공기업 민영화의 경영효율성 제고 효과, 최저임금제의 저소득층 소득증대 효과, 모성보호법의 여성보호 효과 등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한 수치를 알지 못한다. 환경영향평가나 교통영향평가 등 일부 계량적 평가가 있기는 하나 비용과 편익을 화폐가치로 계산하는 관행이 드물다. 대부분 합리적으로 인정되거나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되는 게 다반사다. 때로는 목소리 큰 사람의 의견이 지배하기도 한다.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의 극치라 아니할 수 없다.

 월드컵 신화를 일궈낸 히딩크 감독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축구를 디지털 방식으로 과학화했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적인 체력측정과 영양관리, 파워프로그램에 의한 체력증진, 비디오 분석관이 제공하는 데이터에 기초한 선수기용과 전술구사 등 면면마다 디지털 관리방식을 구현해냈다. 심지어 운동장 잔디의 길이와 습도까지도 상대팀에 따라서 중요한 평가요소가 됐다. 히딩크는 떠났지만 그의 노하우는 디지털로 남아있기 때문에 상당기간 한국축구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만약 고려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디지털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까지도 한국 도자기는 세계 일류상품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세계 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생활속에 디지털 문화, 관습, 사고방식을 심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결국 한국의 미래는 디지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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