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열린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흑인 배우들이 남·여 주연상 및 공로상을 휩쓸면서 미국 사회 전반에 불어닥칠 ‘흑풍’을 예고했다. 그러나 미국 영화계가 흑인들에 대한 개방이 가장 더디고 더욱이 아메리칸익스프레스·메릴린치 등이 최고경영자(CEO)로 흑인을 선임한 점을 감안하면 미국내 흑인 신드롬은 진작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특히 재계에서 흑인 바람을 주도하는 사람으로는 리처드 파슨스 AOL타임워너 최고운영책임자(51·COO)를 꼽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능력을 입증해 인종차별의 족쇄를 뛰어넘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
오는 5월 CEO로 취임하는 파슨스가 주목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타고난 친화력과 중재력 때문. 지난 2000년 AOL과 타임워너 합병 이후 직원들간 갈등과 기업문화 충돌을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를 부여받았다.
실제 파슨스는 정·재계의 마당발로 협상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초에는 부시 행정부로부터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도 있고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을 성사시키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
키가 190㎝가 넘어 ‘커다란 곰인형’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파슨스 개인으로는 각 언론에 의해 ‘2002년 주목할 만한 CEO’에 선정될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 개봉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성공도 그의 앞날을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그가 몸담은 회사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3300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AOL이 인터넷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나 야후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고 AOL타임워너의 합병후 주가 총액은 합병전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AOL타임워너 계열 전문경영지인 포천조차 “올해 AOL 타임워너는 포천 500대 기업 중에서 가장 적자가 많은 기업이 될 것”이라고 평가할 지경에 이르렀고, 파슨스 스스로도 “그동안 부담스러운 목표를 세웠으나 올해부터는 달성가능한 목표를 세울 것”이라고 몸을 낮추고 있다.
업계에서는 레빈도 가고, 스티브 케이스 회장마저 얼굴마담으로 전락한 AOL타임워너호에서 파슨스의 역할은 과거 어느 CEO보다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다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효과 최대화를 기대하는 주주들은 물론 백인일색인 미국 재계에서 파슨스의 성공을 자신들의 앞날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흑인들까지 만족시켜야 하는 부담마저 떠안고 있다.
<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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