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 정보가전부장 etyt@etnews.co.kr
‘한강의 기적’ 이후 한국 산업계에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하지만 민·관·연이 한덩어리가 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CDMA가 거의 유일하다. 덕분에 한국은 독일 총리와 MS 회장이 칭찬하는 정보통신 강국이 됐고 그 핵인 단말기는 승승장구, 우리 수출의 견인차요 기둥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혹시 우리가 ‘휴대폰 성공 신화’에 도취한 나머지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터무니 없는 자신감에 들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큰 일이다. 반도체가 휘청하고 PC가 허덕이고 있는 판에 단말기마저 제 역할을 못한다면 한국 IT제조업의 기반은 흔들리게 된다.
경제 전문가들은 세계 자동차 업계가 향후 10년내에 4∼5개의 거대기업만이 생존하는 글로벌 시대로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 논리는 휴대폰 시장으로도 이어진다. 해마다 4억개 이상의 단말기가 거래되지만 결국은 5∼6개의 업체가 세계시장을 과점하는 날이 곧 닥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미 그 징후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세계 랭킹 3위였던 에릭슨은 단말기를 포기했다. 2위인 모토로라는 급속하게 시장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다. 노키아라는 거인만이 독야청청, ‘힘 쏠림’ 현상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휴대폰 시장은 이미 포화단계에 진입했다. 그래서 사업자간 경쟁은 한층 격렬해져 가격이든 성능이든 아니면 출시 타이밍이건 한발만 삐끗하면 곧바로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는 시장이 됐다. 지난 2000년 단말기 칩을 제공하던 필립스 반도체공장 화재에 제대로 대처한 노키아는 오히려 점유율이 높아졌지만 그렇지 못했던 에릭슨이 생산일정 차질로 17억달러의 손실을 입고 수렁으로 빠진 것은 예도 아니다. 게다가 이제는 수익률도 전처럼 높지 않다. 노키아만이 20% 가까운 영업마진(사실 경이적이다)을 올렸을 뿐 대부분은 5% 미만이다. 생존하려면 1∼2%의 마진을 보고도 사람을 뽑고 라인을 돌리며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한국 단말기업체는 그간 성장과 팽창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사업자 수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특히 탄탄한 기술력과 영업력을 보유한 연구개발전문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진입 장벽도 없어졌다. 돈이 된다하니 누구나 뛰어들 수 있는 시장이 됐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생산기술력이야 지금도 세계 최강 수준이지만 노키아같은 브랜드 파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본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다. 치열한 가격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글로벌 소싱 노하우가 뛰어나지도 않으며 세계적 히트 상품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상반기에만 20개의 신모델을 선보이겠다는 노키아에 맞서 물량공세를 펼 만큼 ‘강심장’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삼성전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에 목을 맨다. OEM방식은 특성상 수익률이 매우 박하다. 그나마 대규모 물량을 수주받으면 몰라도 잘못하다가는 재투자 여력도 없이 공장 운영에 만족해야 한다. 자칫 ‘빈곤의 악순환’이 우려되는 수준이다.
다행히 삼성은 꾸준한 고가전략과 브랜드력 강화로 ‘빅4’에 자리매김했다. 고가품 중심구조 탓에 수익률도 10%로 추산된다. 확실한 생존카드를 받아쥔 셈이다. 나머지 사업자는 기로에 섰다. 자신만의 특장점을 극대화하는 경영전략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LG전자는 삼성 모델을 추구한다. 현대큐리텔은 OEM방식에 승부를 건 것처럼 보인다. 중견업체들도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기준은 단 하나, 수익률이다. 갈수록 저하되는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나름의 비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도 업체도 휴대폰 신화의 ‘착시 현상’을 조심해야 한다. 단말기가 현재는 우리 IT산업의 버팀목이지만 ‘안주’는 금물이다. 밑그림을 다시 그려야 하고 그것은 세계 휴대폰업체들이 지금은 ‘생존게임’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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