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나노기술 현장을 찾아서>(10)일본 히타치연구소

 도쿄의 중심가인 신주쿠역에서 지하철을 탄 지 30여분이 흘렀다. 도쿄의 서쪽 외곽에 위치한 조용한 소도시 고쿠분지로 향하는 중이다. 고쿠분지 전철역에서 내려 찾아간 곳은 히타치 중앙연구소. 고풍스러운 나무가 울창한 숲을 지나자 비로소 연구소 건물이 조금씩 드러났다. 일본을 대표하는 간판기업 히타치의 중앙연구소는 기초과학분야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지원과 연구원을 존중하는 사풍으로 일본 과학자들이 매우 선망하는 직장에 속한다.

 미국에 IBM이 있으면 일본엔 히타치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일본 기업체의 과학연구에서 히타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이 중앙연구소는 히타치 산하의 6개 연구기관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큰 편인데 특히 나노기술을 이용한 전자 및 생명과학 연구에서 세계 첨단을 달리고 있다. 연구소 분위기는 매우 깔끔하고 정형화된 느낌이나 민간기업이라 그런지 실질적인 연구현장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우선 연구소장인 다케다 에이지 박사와 인터뷰를 했는데 시종일관 해박한 지식으로 연구소 현황과 나노기반 생명공학기술의 전망에 대해 명쾌하게 밝혔다. 뒤이어 30대 후반의 젊은 연구원이 등장했는데 자신을 히타치의 차세대 반도체연구를 담당하는 야노 카주어 박사라고 소개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첨단 메모리연구로 미국, 한국 반도체업계에도 꽤 잘 알려진 사람이다.

 야노 박사는 히타치가 나노구조로 연구중인 차세대 메모리의 사용목표부터 설명했다. “멀지 않아 휴대폰이 PC를 대체하는 포스트PC시기가 올 겁니다. 지금의 PC기능이 휴대폰 크기에서 구현된다는 얘기지요. 이러한 휴대형 메모리는 전력소모가 거의 없어야 합니다.”

 히타치는 포스트PC(모바일컴퓨터)를 위해 두종류의 절전형 메모리를 집중 개발하고 있다. 하나는 지금의 D램을 대체할 SESO(Single-Electron Shut-Off:단전자차단) 메모리고 또 하나는 비휘발성 플래시메모리의 차기모델인 MEID메모리다.

 SESO메모리는 D램처럼 정보가 곧잘 지워지는 휘발성이지만 정보유지에 필요한 전력공급회수가 100배나 감소해 전력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인 차세대 휴대형 메모리다. 생리활동에 비유하자면 사람이 한달에 한끼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에너지 절약기술이라 보면 된다.

 D램은 대용량에 값도 싸지만 정보를 지닌 전자가 너무 쉽게 빠져나가 0.1초마다 전원공급(refresh)이 필요하다. 전력소모가 많아 휴대형 메모리엔 부적합하다는 뜻이다. 야노 박사는 이런 문제해결을 위해 메모리 내부의 전자가 쉽게 나가지 못하도록 6겹의 실리콘 원자층(두께 1.5㎚)을 트랜지스터의 중간채널에 균일하게 코팅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전자가 매우 비좁은 반도체공간에 갇히면 양자효과에 의해 외부유출이 지연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험결과 나노구조의 SESO메모리는 10초마다 전원을 공급해도 충분히 기억정보가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SESO메모리는 향후 포스트PC시장에서 오래 가는 휴대폰 PC를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기술이 될 것”이라고 자랑한다. 야노 박사에게 SESO메모리의 상용화 시기를 물어봤다. 다케다 연구소장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사견임을 전제로 2004년까진 가능하겠단다. 일본인 특유의 겸손한 화법을 감안할 때 초절전형 SESO메모리를 내장한 일제 휴대폰이 2년안에 분명히 나온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 같다.

 야노 박사가 소개한 또다른 휴대형 메모리기술은 비휘발성인 MEID(Manufacturing Enhancement by Isolated Dots)메모리였다.

 MEID메모리는 기존 플래시메모리(비휘발성)와 유사한 구조이나 셀당 200여개의 실리콘 나노도트(원자덩어리)가 모여 양자역학적인 게이트구실을 하는데 기억정보를 지닌 전자를 항구적으로 가둬놓는 실리콘 나노도트의 밀도와 크기, 분포를 제어하는 것이 핵심기술이다.

 SESO와 MEID, 두 메모리는 기존 실리콘 반도체공정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제품실용화에 유리한 장점을 지닌다. 이런 관점에서 나노단위의 금속박막으로 제조되는 M램은 뛰어난 성능에도 불구하고 상용화 일정에선 SESO, MEID메모리보다 한걸음 뒤질 것으로 예측된다.

 결과적으로 오는 2004년쯤엔 휘발, 비휘발성을 지닌 차세대 휴대형 메모리가 일본에서 실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나노기술에 기반을 둔 모바일전용 메모리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곧이어 HDD분야의 자기기록연구를 담당하는 후타모토 마사아키 박사가 나왔다. 후타모토 박사는 히타치 연구소에서도 한국내 인맥이 두터운 지한파에 속한다. 그는 한국식 표현도 곧잘 섞어가며 히타치가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는 수직기록식 HDD에 대해 설명했다. 보통 HDD는 정보를 기록하는 금속표면결정이 나란히 옆으로 배열되는 수평기록방식인데 이론적으로 평방인치당 40Gb가 한계로 알려져 연 2배씩 증가하는 HDD 용량확대에 어려움이 따른다.

 반면 수직기록식 HDD는 표면의 나노결정구조를 수직으로 만들기 때문에 단위면적당 정보용량을 수평기록식 HDD의 2∼4배까지 높일 수 있다. 엿가락을 눕혀 깔아놓는 것보다 수직으로 세워놓을 때 수량이 훨씬 많은 것과 같은 이치다.

 현재 후타모토 박사는 수직기록 방식에 의해 평방인치당 52.5Gb의 기록밀도를 달성했다. 일부 외국 연구소에선 더 높은 HDD 기록밀도를 달성한 사례가 있지만 히타치의 연구결과는 실제 생산기술에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록헤드의 형상을 개선하고 금속표면의 나노결정 크기와 방향을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양산기술을 완성함으로써 히타치는 수직기록식 고밀도 HDD의 상용화 가능성을 크게 앞당겼다. 이는 IBM, 리드라이트 등 여타 HDD업체보다 훨씬 앞서는 수준이다.

 “수직기록기술이 완성되면 노트북용 2.5인치 HDD용량은 현재 20Gb에서 100Gb까지 늘어납니다. 다음 단계는 TV셋톱박스, PDA, 휴대폰에도 고밀도 마이크로 HDD가 들어가는 것이죠.” 후타모토 박사는 2004년께엔 수직기록기술로 만든 1인치 마이크로 HDD가 3∼4Gb급의 저장용량을 가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손톱만한 금속원반에 윈도XP환경이 고스란히 들어가는 것이다.

 히타치 중앙연구소에선 일본이 꿈꾸는 휴대폰 안의 디지털세상에 필요한 나노가공기술(전기가 거의 안드는 메모리, 손톱만한 대용량 HDD 등)이 영글어 가고 있었다.

 

 *연구소측이 제공한 나노기술자료를 뒤지다 보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각종 산업도표에서 일본인 스스로 지난 80년대를 재팬 넘버원(Japan as No.1)시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계최고의 산업경쟁력을 지녔던 일등국가 일본에 대한 아쉬움이 깊게 배어나는 대목이다. 일본은 90년대들어 정보사회에 진입하지 못해 미국에 빼앗긴 일등국가의 위상을 나노기술을 통해 되찾으려는 것 같다.

 작금의 일본경제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 주식회사를 받쳐온 거대기업들이 저마다 생존을 위한 체질개선에 몸부림치고 있다. 자회사 1070개, 종업원 34만명의 공룡기업 히타치도 나노기술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일등국가 일본의 꿈은 다시 한번 이뤄질 수 있을까.

 <도쿄=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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