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공(周公)의 단(旦)이 사거(死去)한 지 500년 만에 공자는 ‘춘추’를 저술하여 끊겼던 기록의 전통을 되살렸다. 이제 공자가 사거한 지 500년, 그동안 명주(明主) 현군(賢君)과 충신 의사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사관(史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작정이었으나 급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나를 대신하여 네가 그 기록들을 남겨 내 한을 풀어주면 어떻겠느냐.”
기원전 2세기 경, 병석에 누운 사마담(司馬談)이 사람을 시켜 아들 사마천(司馬遷)을 급히 낙양으로 불러들여 한 말이었다. 이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아버지의 유지를 따랐다.
“불민한 자식이오나 삼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구래(舊來)의 기록들을 잘 정리해 결코 빠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사마천 나이 36세. 아버지 사마담과의 약속은 사마천의 운명이 되었고, 자신의 생식기를 도려내는 궁형의 형벌을 받아가면서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끝내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세계 최초의 종합적인 통사(通史) ‘사기(史記)’였다.
역사서이자 철학서이며, 또한 불후의 문학작품인 ‘사기’는 사마천이 대나무 패찰과 나무판대기에다 한문 52만6500자를 19년동안 130권에 칼로 새기고 옻으로 칠해서 만든, 온 생애를 걸고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당시에 문자라는 매체가 없었다면 숙연하다 못해 차라리 귀기스럽기 조차한 사마천의 노력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
사마천이 아무리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인 좋은 정보라하여도 만일 보편적인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만이 아는 부호를 이용하여 그 정보를 정리하였다면 ‘사기’는 ‘사기’일 수가 없다. 개인과 시대에 국한된 정보일 뿐이다. 사마천의 혼이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문자라는 정보전달매체가 개발되고 활용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어를 기록하기 위한 일정한 체제의 부호로 표시되는 문자는 넓은 의미로 시각적 기호를 통하여 인간 상호간 의사소통을 위한 관습적이고 규약적인 통신체계다. 인류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문자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언어가 시간적으로 전개됨과 동시에 사라지고, 공간적으로 멀리까지 전달될 수 없다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따라서 인간의 1차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언어이고, 문자는 2차적인 의사소통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과 언어의 사용과 함께 인류를 획기적으로 진화시킨 정형화된 문자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체로 지금부터 약 4000∼6000년 전부터 수메르, 이집트, 인도, 중국에서 각각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약 4000년 전인 은나라 때에 문자가 최초로 쓰여지기 시작하여 기원전 1700년경에 상형문자, B.C 206∼A.D 220년 경의 한나라 시대에 와서 한자로 형성되었고, 서양에서는 기원전 3000∼4000년 경부터 이집트인과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최초로 문자가 쓰여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자사용의 초기에는 웅장한 서사시나 우아한 시를 짓는 것과 상관없이 오직 장부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교역과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기록하기 위해 통치자, 황족, 승려 그리고 상인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문자의 발달과정에서 문자를 활용해본 인류는 대단히 편리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때문에 매우 급속히 퍼져 나갔다. 문자의 필요성은 국제교역과 개인의 상거래 모두에게 공통적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문자뿐만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매듭이나 막대, 조가비띠 등을 사용한 흔적이 있다. ‘옛날에는 매듭을 매어서 다스렸는데, 뒤에 성인의 서계(書契)로 바뀌었다’는 중국의 고대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정한 약속 아래 매듭을 맴으로써 서로의 언약이나 중의(衆意)에 의해 결정된 정보를 보존해 두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매듭과 같은 형태의 통신수단을 글자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으나 글자의 선도적 구실을 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를 ‘기억돕기시대(memory stage)’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장 오래된 문자는 그림문자다. 이것은 작은 그림을 기호로 사용하여 사물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말머리는 말을, 소머리는 소를 나타내는 방식이다. 초기의 그림문자는 단지 기억을 보조해 주는 수단에 불과했으며,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사용된 것은 인류의 문명이 크게 발달한 중국,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마야 등의 문자를 들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의 기록방식은 작은 벽돌 모양의 진흙판에 문자를 기록하는 것으로, 진흙판은 초보적인 정보저장 수단으로서 후일 이 지역에서 문자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수메르의 그림문자는 도표식으로 긁어서 표현하였는데, 이 방식은 진흙판에 눌러서 표현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었다.
수메르인과 바빌론인들이 측적된 의사소통 도구로 사용한 쐐기 모양의 그림문자는 설형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설형문자는 수메르와 악카드에서 사용되었으며, 이후 중동전역에서 사용하게 되어 현재도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이 글자는 물체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서 중국의 고대문자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표의문자인 고대 한자와는 달리 표음문자의 성격도 동시에 띠고 있었다. 즉, 이집트의 상형문자는 물체의 형상만을 본뜬 것이 아니라 음성도 본떠서 만들었다. 상형문자는 점점 발전하여 추상적이고 음성만을 표시하는 글자로 변천하여 현대적인 알파벳문자의 기반을 이루었다. 알파벳문자는 단어의 요소나 소리를 추상적인 기호로 나타내는 것으로, 가장 발달한 단계의 문자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문자는 이집트인들이 파피루스라는 다년초의 줄기로 만든 종이와 비슷한 것을 발명하여 기록에 활용하게 되면서 문자를 보편화된 통신수단으로 보급시키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어 종이가 발명되고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문자를 이용한 통신을 통해 또한번 급속한 진화를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제작하던 때는 종이와 인쇄술이 활용되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사마천은 그 많은 내용을 죽간이라는 대나무 패찰과 나무판대기인 목간에 일일이 글자를 파고 옻칠을 하여 정보를 저장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은 ‘사기’ 집필에 매달린 지 7년째 되던해 흉노족에 항복한 한 장군을 옹호하다 효무제에게 미움을 받게되어 투옥되고 궁형(宮刑)을 선고받았다. 생식기를 제거당하는 남성의 가장 치욕적인 형벌로, 목숨을 건진다해도 악취가 나게 썩기 때문에 부형(腐刑)이라고도 하는 형벌이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살아야 했다. 중국의 통사(通史)를 쓰겠다고 한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보에 대한 애착이었고, 후대에 전해주어야 한다는 열의였다.
생식기를 제거당한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 모든 시간과 정력을 ‘사기’ 집필에 바치면서도 사마천은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사기’가 영원히 전해질 수 있다면 자신의 치욕은 씻겨질 것이며, 그 때 자신에겐 아무런 한이 남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나이 55세. 집필을 시작한지 19년째 되던 해에 문자를 활용한 최초의 통합적인 역사서 ‘사기’가 완성되었다. 당시의 책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 아버지와의 약속과 정보가공과 전달에 대한 사마천의 가치 확신은, ‘사기’에 수없이 나타나는 절대 권력자들보다 인류 역사에 대한 역할이 더욱 중차대 했던 것임을 문자통신의 중요성과 함께 우리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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