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관련 중견 기업에 다니는 연구소장 A씨는 대기업 임원에게 전화로 ‘문안(?)’ 드리는 일로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경기불황으로 어려운 이 때 행여나 중요 고객의 심기를 건드려 ‘괘씸죄’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다. 사실 A씨는 불과 2, 3년 전만해도 이 대기업에 연구원으로 근무했었다. 잡다하게 할 일은 많고 실권이 거의 없는 대기업 연구원 생활에 회의가 들면서 A씨는 사표를 던지고 잘 나간다는 중견 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직 후 A씨는 30명 가까이 되는 연구 인력을 데리고 기술 확보와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그 때만 해도 A씨는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IMF 외환 위기로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회사에서는 A씨에게 기술 개발 외에 다른 업무를 요구했다. 이전에 A씨가 몸담았던 기업에서 꽤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발주했는데 이 사업권을 따는 데 ‘물밑(?)’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A씨는 연구소와 마케팅 본부를 오가고 있다. 본의 아니게 ‘기술영업 본부장’이라는 어정쩡한 직함도 가지고 있다. 기술 개발과 연구에 욕심이 있어 이직한 A씨는 지금은 영업 반, 기술 반이라는 이중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
기업 기술연구소가 흔들리고 있다. 기술 인력이 경쟁력이라는 명제는 이미 색깔이 ‘바래진’ 지 오래다. 그 나마 시장이 좋을 때는 기술 로드맵과 제품 순환 주기를 고려해 연구 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고 수요가 시들해지면서 기술 인력의 입지가 크게 휘둘리고 있다. 기술 개발에만 몰두하기에는 시장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기업의 위기 정도가 촌각을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상황도 문제지만 회사에서도 더 이상 엔지니어를 엔지니어만으로는 보지 않는다. 기술을 알고 있는 만큼 영업에서도 실력 발휘를 하기를 원하고 있다. 엔지니어는 이제 기술 전문가에서 가끔은 사장을 도와 ‘술상무’ 노릇도 해야 하고 애프터서비스가 바쁠 때는 ‘보조 AS맨’으로도 뛰어야 한다.
엔지니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기업의 생존 시스템이 뿌리부터 휘청거리고 있다. 엔지니어가 영업이나 과외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결국 기업 경쟁력에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핵심 기술에 구멍이 날 수밖에 없고 연구원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져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손쉽게 위기 상황에 대응하려다가 도리어 회사가 자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기술 개발에 몰두하지 못하는 연구 환경은 자연스럽게 ‘철새 엔지니어’와 기술 인력의 공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돈만 많이 준다면 가볍게 회사를 옮기는 풍조가 엔지니어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확산되고 이에 따른 기술 공백은 기업은 물론 우리나라 전체 기술 경쟁력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최근 몇 년간의 각종 조사는 이를 현실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대덕 연구단지의 간판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2001년 한해 동안 외국으로 빠져나간 기술 인력은 모두 30명 선에 달한다. 벤처 열풍이 한창이던 99년에 비해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연구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는 방증이다. 연구 인력 충원을 위한 장려금 제도 등이 마련됐지만 충원은커녕 기존 연구원의 이탈을 막는데도 애를 먹고 있다. 민간 기업 연구소는 더욱 심각하다. 중견 기업 이상의 연구소의 경우 핵심 분야 연구진만 지난 98년 이후 30% 가까이 빠져 나갔다. 입사 10년차의 과장급 이상 연구진은 이제 전체 연구원의 10%에 불과하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최근 300군데 벤처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인력 조사 결과는 더 충격적이다. 현재 벤처에 몸담고 있는 기술 인력 가운데 70% 정도가 이직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 중 40% 정도는 앞으로 2년 이내에 이직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철새 엔지니어’의 단면이다.
연구 인력, 즉 엔지니어의 임무는 기술개발이다. 누구보다도 앞서 시장과 기술 트렌드를 짚어내고 회사의 사활을 걸 핵심 기술과 신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엔지니어가 원하는 조건 중에 하나는 물론 높은 보수일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바라는 것은 좋은 연구 환경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쾌감처럼 엔지니어는 새로운 기술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다. 단순히 시장 수요에 대응하는 제품 수준을 넘어 시장을 휘어잡을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만큼의 노력과 정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잘 나가는 기업의 연구소는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엔지니어가 신바람 날 때 기업 역시 정체되지 않고 생기가 돈다. 기업 ‘회춘’의 비결은 마케팅이 아닌 탄탄한 기술 인력에 달려 있는 셈이다. ‘기업 경쟁력=우수한 인력’이라는 말이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갖춰야 하며 그만한 보상이 뒷받침돼야 한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인터뷰>
◇이경복 다인텔레콤 사장
“기업의 경쟁력은 결국 기술입니다.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마케팅 역시 튼튼한 기술력이 뒷받침될 때 원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술 인력과 기술을 만들어 나가는 연구소에 대한 배려와 투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경복 다인텔레콤 사장은 어느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와 마찬가지로 ‘기업 경쟁력=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단, 차이는 이 사장은 이를 구체적인 방법으로 옮겨 사람을 실질적인 기업 경쟁력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기술 인력의 집중’과 ‘기술 네트워크의 구축’이다.
이 사장은 먼저 엔지니어는 오직 기술 개발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지난해 경기 여파로 20명대로 인력을 슬림화하는 등 구조 조정을 단행했지만 연구 인력은 거의 대부분 손을 대지 않았다. 또 부족한 인원에도 불구하고 결코 ‘과외 업무’를 주지 않는다. 연구 인력은 오직 기술 개발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기술 인력은 연구 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엔지니어는 제품 개발과 전략적으로 추진하는 해외 사업과 관련한 기술 지원에만 신경 쓰면 되는 셈이죠. 엔지니어가 신바람이 나야 결국 회사도 생기가 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하는 벤처 기업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 업무만 하는 식으로 인력을 운영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사장이 택한 또 하나의 전략은 기술 네트워크 구축이다. 이는 핵심 기술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른 회사와 적극 제휴해 공동 개발한다는 전략이다.
“벤처는 덩치가 가벼워야 합니다. 그래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술과 시장 상황에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핵심 기술을 제외한 나머지는 경쟁력 있는 업체와 제휴하면 그만입니다.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생각은 도리어 기업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장은 “중소 규모의 벤처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홈PNA, 초고속통신장비, 스위칭 장비 등 일련의 제품 라인업을 갖출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네트워크의 효과”라며 “지금도 태광산업이나 전자통신연구원 등과 공동 개발 형태로 기술력을 쌓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덕택에 다인텔레콤은 올해 150억∼200억원 수준의 매출액을 자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수출비중이 60∼70%에 달한다. 다인은 이미 중국에서 기술력을 인정받아 제품 선적을 시작했다. 또 대만과 일본·홍콩업체와도 제품 테스트를 마무리하고 수출 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 사장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기보다는 한 가지라도 확실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결국 기업 성장의 비결”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 이는 이 사장 스스로 대기업 기술연구소 말단 연구원에서 회사를 창업하고 몇 번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얻은 소중한 교훈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우수 기업 연구소를 찾아서
다날이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믿는 ‘다날연구소’<이상학 기자 leesh@etnews.co.kr>
‘특허가 많은 회사.’
벨소리 다운로드와 휴대폰 지불 결제 서비스로 잘 알려진 다날(대표 박성찬)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특허’다. 특허는 기술력의 다른 표현이다. 또 그만큼 연구 개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의미다. 어느 분야보다도 경쟁이 치열한 다날이 휴대폰 결제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배경도 따지고 보면 그만큼 기술에 거는 욕심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로 설립 6년째인 다날은 25건에 달하는 특허를 등록했거나 출원해 놓은 상황이다. 실용신안 등록 건수 역시 10건에 달한다. 전화기를 이용한 문자 입력 시스템, 다운로드 기능을 갖춘 전화 단말 시스템, 벨소리 다운로드 서비스, 인터넷 인증 시스템 등 통신·인터넷 관련 특허를 두루 가지고 있다.
“벤처기업은 기술이 경쟁력입니다. 무형의 기술력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 기술 특허지요. 다날의 미래에 자신을 갖는 것도 사실 연구원들이 밤을 새워 개발한 기술 때문입니다.”
박성찬 사장은 ‘기술이 제1의 경쟁력’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최고경영자의 이같은 철학은 우수한 기술 인력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이어졌고 결국 지금의 ‘다날’이라는 회사를 만든 것이다. 다날은 현재 전체 직원이 87명이고 이 중 연구 개발 인력이 45명을 넘어섰으며 올해 안에 20명의 인력을 더 충원할 계획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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