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 경기회복 시점이 다시 한번 도마위에 올랐다. 연초만 해도 ‘국내외 IT 경기가 빠른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나 최근들어 ‘IT 경기회복이 지연될 수 있다’는 시각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IT 경기가 바닥을 확인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을 보이지 않고 있으나 회복시점은 좀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부터 미국 증시에서는 미국 경제가 회복세를 보인듯 하다가 다시 경기후퇴에 빠져드는 ‘더블딥(Doubble Dip)’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경제가 지난해 경기침체를 유발한 IT 등 여러 산업분야의 급격한 재고조정으로 올 1분기에 플러스 성장을 기록할 전망이지만 이후 수요회복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IT 등 수요의 뒷받침이 없다면 생산증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올해에도 미국 경제의 재고부담이 재연될 수 있다”며 IT경기 조기회복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IT수출의 높은 대미의존도를 감안할 때 미국 경기회복이 더디거나 침체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국내 IT 경기회복 시점도 상당기간 늦춰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국내의 이같은 시각은 최근 국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IT 경기 조기회복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같은 시각은 최근 국내외 경제통들의 입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미국의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앨런 그린스펀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지난 11일(현지시각) 한달여만에 처음 갖는 공개적인 경제논평에서 “경기침체가 끝나가고 있다는 일시적인 조짐들이 있지만 현재 그런 신호들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며 “미국 경제는 여전히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1년간 단행한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여전히 어렵기 때문’에 추가 금리인하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6일 한 라디오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내외적인 불확실성이 남아있다”며 “다운사이드 리스크(Downside Risk:예상보다 더욱 악화될 위험 요인) 발생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말했다. 전 총재는 대외적인 다운사이드 리스크로는 IT 부문의 침체지속에 따른 미국 경제의 회복 지연을 꼽았다. 또 테러전쟁 아랍권으로의 확산에 따른 국제유가의 급등과 일본의 금융위기 발생, 엔화의 급락도 위험요소라고 지적했다.
주식시장은 이같은 분위기를 가장 빠르게 반영했다. 특히 연초 반도체 등 IT 하드웨어주를 사들이며 연초랠리를 이끌었던 외국인들이 발빠르게 주식을 대거 팔아치우고 있다. 외국인들은 이번주에만 삼성전자주를 위시한 IT주를 중심으로 거래소시장에서 6475억원 이상을 국내 증시에서 매도했다. 외국인들의 집중 매도 이유는 그린스펀 발언후 나스닥시장의 2000선이 붕괴되는 등 미국 증시가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경기회복 조짐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내 주식들이 너무 올랐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증권가에서도 일부 IT주들이 경기회복 속도에 비해 기대감만으로 지나치게 주가가 올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반도체장비주가 대표적인 사례. 반도체장비주는 올해 삼성전자 등 반도체업체의 설비투자 축소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연초 반도체 랠리에 편승해 주가가 과도하게 상승했다는 분석이다. 김문국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아직까지 반도체업체들이 설비투자에 대해선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도 반도체장비주가 지난주 기대만으로 주가가 과도하게 올랐다”며 “하이닉스반도체의 반도체 부문이 마이크론테크놀로지로 넘어갈 경우 국내 반도체장비업체들이 오히려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나 시스템통합(SI) 분야는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마저 떨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증권이 조사한 핸디소프트 등 코스닥시장의 대표적인 8개 소프트웨어업체들의 올해 실적을 추정한 결과 영업이익률이 14%로 지난해 8%보다는 높았지만 지난 99년 수준(20%)에는 크게 못미칠 것으로 나타났다. 한 소프트웨어 담당 애널리스트는 “최근 소프트웨어업체를 탐방한 결과 지난해보다 올해 더욱 긴축경영을 하려는 업체가 상당수 있었다”고 말했다.
SI주도 산업의 특성상 경기회복 후에 실적개선이 나타나기 때문에 경기회복 기대감만으론 섣불리 실적개선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종길 동원경제연구소 연구원은 “기업들이 올해에도 전산투자를 보수적으로 가져가고 있다”며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SI주는 연말이나 내년초쯤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국내 IT 경기를 낙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반도체와 정보통신기기의 수요회복세가 나타나고 있는데다 월드컵 등 한국의 경제를 견인할 만한 요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가 지난 5일 발표한 올해 11개 주요업종별 생산 및 수출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생산과 수출에서 각각 40% 이상 감소해 국내 IT 경기침체를 주도했던 반도체의 경우 생산은 지난해보다 15% 늘어나고 수출도 19%나 증가, 경기상승을 견인할 전망이다. 또 정보통신기기도 생산과 수출이 각각 전년보다 20% 이상 늘어나는 등 가파른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됐다.
한편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 16일 국내 경기가 올해 완만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수출호조를 보이고 있는 휴대폰은 가파른 회복세, 내수와 수출에서 회복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전은 완만한 회복세, 반도체와 PC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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