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에게 듣는다>(8)전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

 대담=디지털경제부 김경묵부장

 

 ‘아름다운 은퇴’라는 찬사 속에 스포트라이트 뒤편으로 사라진 정문술 전 미래산업 사장. 그렇게 사라진 정 사장의 요즘 행보는 우리에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정 사장은 자신의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분명 어디선가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 사장의 오늘을 궁금해한다. 여생을 인력양성과 자선사업에 힘쓰겠다고 선언한 이후 ‘한국의 노벨’로까지 일컬어지는 벤처대부, 인간 정문술을 어렵게 만나봤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다들 궁금해 하던데요.

 ▲어떻게 하면 곱게 늙을 수 있는지를 연구중이지요.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 동아리들과 만나거나 농업벤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하고 대화하면서 그냥 편하게 지냅니다. 웬만해선 기자들하고는 전화 통화도 안합니다. 요즘은 기자 만나는 게 제일 싫어요(정 사장은 요즘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관심가는 일을 하면서 주위를 살피고 싶단다).

 공인도 아니고 이젠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식들도 잘 키우고 싶고. 물론 자신의 길은 자신이 결정하겠지만 잘 뒷받침해 줘야지요. 첫째 놈, 둘째 놈 모두 공부하라고 볶지도 않았는데 꽤 유명한 외국대학에 가서 열심히들 하고 있습니다(정 사장의 첫째 아들은 카네기멜론대, 둘째 아들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 다니고 있다).

 ―요즘 벤처업계에는 젊은이를 야단치고 이끌어 줄 어른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강연이라도 다니면서 사장님이 그런 역할을 해주셔야지요.

 ▲은퇴했는데요 뭘. 그리고 내가 뭘 알아야 해 줄 말도 있지요. 난 요즘 아무것도 몰라요.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들은 그런 것에서 멀어지면 심리적 패닉현상 같은 것이 온다는데요.

 ▲사실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벌써 다섯개 대학에서 명예박사를 준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근데 안받았어요. 그런 거 받고 강연하고 하게 되면 왠지 곱게 늙지 못할 것 같아서. 요즘 시대에 곱게 늙는 것은 돈과 명예를 멀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나이가 들면 명예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지는 것 아닌가요.

 ▲글쎄요. 강연하고 박수받고 하면 좋겠지요. 근데 그런 건 마약 같은 겁니다. 한 번 시작하면 계속 하게 될 것 같아 참고 있어요. 일하던 사람이 놀면 빨리 늙는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가정을 돌보면서 조용히 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정 사장은 요즘 주말마다 부인과 골프를 즐긴다. 정 사장이 마음먹은 대로 안되는 것 중에 하나가 부인보다 골프 핸디를 줄이는 것. 드라이버 거리도 부인이 더 길다).

 ―우리나라의 20세기 후반은 벤처와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 요즘 벤처들 어떤 것 같아요.

 ▲보지도 않거니와 평가도 안합니다. 내가 지금의 벤처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곱게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곱게 늙는 건 욕심을 버리는 것이고 그래야 후배들도 따라 할 것 아닙니까.

 ―무슨 무슨 게이트가 계속 터져 요즘 벤처인들이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는데요.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 벤처인이 아닙니다. 전부 브로커일 뿐이지요. 가슴이 답답한 건 누군가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모두 침묵하고 있으니 정말 기술력을 갖고 진실한 벤처인들만 억울하지요.

 ―전통 벤처인의 기준이 뭐지요.

 ▲내가 항상 이야기하는 건데요.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기술개발에 사력을 다해야 하며 자기 집을 팔아 사업을 한 다음에 잘 되면 펀딩받고, 국내보다는 해외시장을 보고 달려들고 주가관리하지 말고 사업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진정한 벤처인이지요.

 ―정부의 요즘 벤처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관심 없습니다(정 사장은 정책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닫아버린다. 그래서 다시 벤처업계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했다).

 ―전에 안철수 사장을 칭찬하신 적이 있는데. 요즘 일부에서 ‘바이러스는 돈 벌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다’ ‘안철수바이러스에도 거품이 많다’는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나라에도 진정한 벤처스타가 필요한데. 사실 그만한 사람도 없잖습니까. 잘한 것은 잘했다고 말해주고 밀어줄 부분은 밀어주는 사회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거품은 안철수가 만든 겁니까. 사회에서, 언론에서 만든것이지.

 ―KAIST에 300억원을 쾌척하셨는데 사장님 생각이었나요.

 ▲난 재단을 만들어 뭘 한다는 것이 싫었어요. 재단정신은 그런게 아닌데 일부에서 재단의 소유권이 창설자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리고 카이스트에서도 내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과를 신설해 줬기 때문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기존 학과의 틀을 조정해 시대 흐름에 맞춰 재조정하는 곳은 일본 자이스트 정도뿐이 없거든요. 우리나라 대학도 새로운 산업, 경제 흐름에 맞춰 유연하게 새로운 학과를 신설하고 조류에 맞지 않는 학과는 폐지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는 생각도 이번에 했습니다.

 ―주위에서도 모두 찬성하셨나요.

 ▲찬성이나마나 내가 결정하는 거 아닙니까. 물론 섭섭한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집사람한테 조금 미안하더라구요. 근데 식구들 모두 동의해 줬습니다. 특히 잘했다고 말해주는 아들놈들을 보니까 내가 애들을 잘 키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BT와 IT를 결합하는 BIT산업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요즘 BIT 열풍이 전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하면서 사장님의 안목을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인데요.

 ▲사실은 꿩 대신 닭이었습니다. 뭐 뾰족한 게 없더라구요. BT세상이 오고 있는데 순수 BT산업은 거의 미국이 주도하고 있고 영국하고 일본도 부분적으로만 추진하고 있지요. BT기술이 우리 생활에 혁명적인 부가가치원이 될 것임에 분명하지만 순수 BT분야에 우리가 들어갈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BT와 다른 전통 또는 IT산업과의 융합을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BT와 IT가 융합된 분야에서 뭔가 높은 부가가치를 추구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BIT분야는 미국·일본·유럽 모두 초보 수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 경쟁력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우리 갈길은 선택과 집중을 통한 틈새산업 육성이잖아요. 물론 아직 초기 단계인 BIT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튈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손 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이 분야 인력을 늘려 길목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나름대로의 분석을 통해 결정했습니다. 내가 BIT 이야기를 처음 꺼낸게 꽤 됐는데 그 이후에 앨빈 토플러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내 생각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고 사실 기분이 좋더라구요. 난 그냥 감으로 이야기 한건데 말이죠.

 ―벤처인 사이에서는 정 사장님을 가리켜 ‘한국의 노벨’이라는 평가를 하던데요.

 ▲그런 게 다 사대주의적인 생각이지요. 내가 정문술이지 왜 노벨입니까.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 사회에 돈을 환원한 것뿐입니다. 돈은 결코 홀몸으로 오지 않지요. 항상 더 가져야겠다는 욕심과 지켜야겠다는 바람과 함께 옵니다. 나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돈을 버는 뿌듯함, 배부른 포만감, 성취감과 함께 등짐을 벗어버리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어요. 종교적인 이야기지만 남한테 베푼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것이 되는 겁니다.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관리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후배 벤처인에게 진정한 자기 것을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난 원래 소화력이 다른 사람보다 좀 떨어지는데 맛있는 것을 보면 꼭 식탐을 해서 배탈이 나곤 합니다. 모자람의 미학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지요. 가만히 보면 기업을 하다가 말로가 안좋은 사람들도 바로 이 모자람의 미학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더라구요.

 ―경기를 어떻게 보세요.

 ▲1년을 논 사람한테는 아무 것도 안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 내가 뭘 알겠습니까. 신문도 잘 안보는데요.

 ―바둑도 실제 두는 사람보다 훈수두는 사람한테 잘보이잖아요.

 ▲지난 수십년간의 세상을 가만히 돌아보면 탈도 많고 문제도 많았지만 길게 볼 때 서서히 발전해 왔지요. 한 때는 다 죽을 것 같지만 나름대로 성장을 계속하고 있잖아요.

 ―제2의 벤처붐이 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한테는 그런 붐을 일으킬 만한 역량과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끼리는 어렵고 선진 외국에서 단초가 될 만한 바람이 불어줘야 할 것 같아요.

 ―벤처모임은 왜 안나가세요.

 ▲은퇴했으니까요. 박수가 나온다고 무대에 그대로 서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내려와야 다음 순서가 진행되지요.

 김 부장, 미안하지만 그만 갑시다. 이제 나 등산 갈 시간이요(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인터뷰라면 너무나 완강히 사절이라던 정 사장 모습이 떠올라 심하게 고민됐다. 혹 조용히 지내고 싶은 그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어쩌랴.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정리=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

 

 정문술 (鄭文述)

 

 약력

△38년생 △56년 남성고등학교(전북) △58년 원광대학교 종교철학과 △62년 중앙정보부 기조실 조정과 과장(부이사관) △83년 미래산업 대표이사 사장 △96년 반도체산업협회 이사 △99년 라이코스코리아 대표이사 사장 △99년 벤처리더스클럽 회장 △상훈:특허청장상(92년) 신한국인상(94년) 충청남도기업인대상(95년) 산업포장 32회 조세의날(98년) 한국의 경영자상 능률협회(98년) 한국전문경영인학회 벤처기업부문 CEO대상(2001년) 납세자의날 철탑산업훈장(2001년) △저서:왜 벌써 절망합니까/청아 에세이집 △취미:등산 △좋아하는 음식:청국장 △종교:기독교 △좌우명:미래지향 △가훈:미래를 위해서 산다 △감명깊은 책:폴 마이어와 베풂의 기술(존 해기아이 저) △존경하는 인물:폴 마이어(미국 성공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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