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전 과학기술부 장관) 박사는 달변이다. 달변가들은 보통 열정이 없게 마련인데 그는 다르다. 달변이면서 열변이다. 국방과학연구소장, KIST 원장, SK텔레콤 사장, 초당대 총장, 과학기술부 장관을 거친 서 박사는 그의 인생여정답게 모든 부문에서 당당하다. 현직에서 물러나 왕성한 인터넷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를 양재동 자택 서재에서 만났다.
그의 서재에는 그가 좌우명으로 삼고있는 ‘대관세찰(大觀細察)’이라는 붓글씨 한점이 걸려 있다. 크게 보고 세밀히 살핀다는 뜻. 그에게 ‘크게 보고 세밀히 살펴본’ 우리 IT산업의 미래를 물었다.
<대담=정복남 부국장 겸 정보통신부장>
―관직을 떠난 후에도 인터넷 활동에 바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황과 건강은 어떠신지요.
▲저는 원래 게으른 사람입니다. 제가 바쁘게 사는 것은 하느님이 일로 벌을 주셨기 때문이지요. 저는 새로운 일을 또 꾸미고 있습니다. 후배들과 전에 약속한 것이 있는데 이제 그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는 때가 됐기 때문입니다.
건강요. 자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어 조심조심 사는 겁니다. 해외출장이 잦아 ‘힘들다, 과로다’ 하지만 비행기 속에 가만히 앉아 쉰다고 생각하면 몸과 마음이 편하고, PC를 갖고 다니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책도 읽고, 영화도 보며, 낮잠을 잘 수 있고, 아름다운 스튜어디스의 친절까지 있으니….
―임오년이 밝았습니다. 후배들에게 한 말씀 덕담을 하시죠.
▲초년 고생은 금을 주고 사라는 말이 있죠. 진부하게 들리지만 그 뜻을 후배들이 되새겼으면 합니다. 특히 정보통신분야, 과학기술분야에 있는 사람이라면 초년 고생을 기본 자산이라 생각하길 바랍니다. 초년 고생이 평생 살아갈 기초체력과 기본지식을 닦는 것입니다.
―국내경기가 침체됐다고 합니다. IT경기도 더불어 침체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해법이 있기는 한 겁니까.
▲우리 주변에는 물장수만 있어요. 가뭄이 들었는데 샘을 파는 일꾼이 없어요. 모두 물통만 들고 있지요. 샘이 솟아야 물장사가 되듯이 기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IT도 예외가 아니죠.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그간 남의 지식, 기술, 자본으로 상품을 개발하고 수출해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로서는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려면 앞으로 장기적으로 원천지식, 기술, 자본을 창출하고 축적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 되는군요.
▲맞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본이지요. 역사가 220년 남짓한 미국을 보십시오. 국력의 기본인 농업, 공업, 교육, 과학기술 등에서 지식창출을 했기에 유럽을 앞지른 것입니다. 실용주의 교육이 기본에 충실해 미국이 기초과학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게 됐지요. 대학은 이미 존재하는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던 신지식을 창출하는 곳이 됐습니다.
―IMF 구제금융 후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맸습니다. 3년 만에 IMF를 졸업했다는 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아직 구제금융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온고이지신이랄까, 역사에서 우리는 배웁니다. 1930년대 미국은 주가폭락, 세금증가, 지불능력감소, 세수격감, 기업도산 등 대공황에 처했습니다. 시장은 마비되고 저축은 바닥이 났습니다.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금융업계를 문책하고 관료들을 질타했습니다.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노변정담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처럼요. 루즈벨트는 국력을 약화시키는 막연하고 감흥적인 당찮은 두려움을 경계하고 숨김없는 국정을 했습니다. “경제불황은 단번에 해결될 수 없다. 상당기간 지나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사실 ‘뉴딜’정책도 3년이 지나서야 국민의 호응을 얻고 노조가 협력해 효력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경제위기에 처해 경제외적 성찰을 해야 합니다. 도덕붕괴, 불신, 부실, 부정부패, 방만, 태만, 반복, 질시야말로 경제를 좀먹는 사회악입니다. 우리는 중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 열이 좀 내렸습니다. 아직 퇴원은 이릅니다. TDX, CDMA사업을 맡아 가닥을 잡는 데도 몇 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국가경제가 3년에 완쾌되겠습니까. 국민의 인내와 화합이 절실합니다.
―최근 벤처붐에 대한 자성론이 일고 있습니다. 거품론에서부터 망국론, 희망론, 재기론 등 다양한데요.
▲벤처의 생태는 창조와 모험의 열정 때문에 고온다습합니다. 항상 성패의 희비가 교차하죠. 고온다습하다 보니 병균이 잘 자랍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에는 온갖 천재와 사기꾼이 모인답니다. 벤처가 성공하려면 엔젤펀드, 그야말로 천사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엔젤은 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지도까지 합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사회에는 벤처가 서식하기 힘듭니다. 벤처기업은 사업에 실패해도 원상복귀가 가능해야 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훌훌 털고 재도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벤처사업을 하다 친척, 친구 등 주변에 낭패를 안겨준다면 그것은 벤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벤처정책은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모험이 아니라 목숨을 걸었으니까요.
▲벤처사업은 미지에 대한 도전이며 무지의 극복입니다. 졸속정책을 집행하다 보면 실패는 다발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 세운 정책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책임은 벤처기업가들이 지게 되죠. 성패를 논하기에는 시기상조입니다. 조급하게 성과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뜸들기 전에 뚜껑을 열면 선 밥이 됩니다. 끈기 있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IT산업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정부가 IT산업을 주도하는 시대는 갔습니다. 미국의 FCC처럼 주파수관리, 독점규제, 공정경쟁, 정보윤리에 주력해야 합니다. 방송위원회와 통신위원회가 따로 있는 것, 동기·비동기를 놓고 시끄럽던 3세대 방식 선택 모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정부가 간여하다 구곡간장이 될 뻔했습니다. 우리는 2세대 서비스를 실현하면서 3세대 기술을 제법 확보했습니다. 문제는 사업성이 있는지, 수출산업으로 어떠한 전략을 세워야 하며, 새로워질 4세대에 어떻게 대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정책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을 텐데요. 우리 과학기술이 너무 실용화를 강조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장관 재직시 프런티어사업을 도입한 것으로 아는데, 국내 과학기술분야에 대해 정리를 해주신다면요.
▲국민소득이 1만달러가 안되는 나라의 과학기술은 우선 실용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미국이 과학기술 선진국이 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개발도상에 세워진 공공연구소들은 잘못 관리하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대학과 기업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변신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시한부 프런티어사업단은 기존의 타성을 타파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미국의 대학은 과학기술인력을 양성하고 연구개발을 선도하며 군장교(ROTC)까지 배출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학도 과학기술분야의 인력자원과 연구성과를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대학은 새로운 지식, 정보, 기술로 사회를 혁신해 국가경쟁력을 강화합니다. 이 때문에 대학을 사회개혁의 주체라고 하며, 특히 연구하는 대학을 왕관의 보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대학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과학기술 행정도 고시제도로 확보된 인력만으로 수행하기에는 사업규모가 크고 지식체계가 복잡합니다. 전문성과 연구개발관리 능력을 갖춘 인력자원에 문호를 개방해야 합니다.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 묻겠습니다. 경기침체가 큰 관심거리입니다. 일본이 IT부문에서 한국에 뒤졌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치유신으로 세계 열강에 오른 일본경제는 성장의 한계에 달해 평성유신(平成維新)이라 할까, 정치개혁, 교육개혁, 공공개혁, 기업구조조정, 군비증강 등을 통해 새로운 성장전략을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IT부문에서 일본이 뒤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저는 우리가 크게 앞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미국과 달리 일본의 경기침체가 10년째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경제를 미국과 비교하면 안됩니다. 미국은 개방적이고 독립변수가 많고, 일본은 폐쇄적이고 종속변수가 많은 나라입니다. 일본은 상품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하면서도 인력자원은 외국대학 출신보다는 국내대학 출신을 우대했습니다. 일본이 2세대 이동통신에서 PDC와 같은 고립된 표준을 채택한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대학의 변신을 봐도 분명합니다. 쓰쿠바대학, 도쿄대학의 무용론, 국립대학 특수법인화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학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개방하고 개혁하라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것입니다.
일본은 3세대 이동통신에서는 WCDMA라는 국제표준을 택했습니다. 우정성 해체, 문부성-과학기술청 합병에 더해 총리 신사참배, 해외파병, 군비증강 등은 국제사회의 여론과 달리 일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애국애족, 자주국방이라는 명분이겠지요.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있다면요.
▲우선 중용의 고독을 생활화하고 세속적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지도자를 기대합니다. 다음으로 근면성실이 성공하고 공명정대가 존중되는 사회, 국가안보에 철저하고 국제외교에 능란한 정치를 갈망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업활동에 자율이 보장되고 빈부와 세대간의 갈등이 해소되며 남북통일과 지역화합에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를 기대합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선거철마다 무슨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요구, IT대통령이 되겠다는 공약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경제, 교육, 과학기술, 환경 등은 전문가에게 믿고 맡기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끝으로 공정한 세무행정, 투명한 금융제도로 국가운영과 기업경영이 되는 정치의 고도화를 기대합니다.
△1934년생 △57년 서울대 전기공학 학사 △69년 미국 텍사스 A&M대학교 전기공학 박사 △57∼70년 공군사관학교 교수 △83∼89년 한국전기통신공사 전전자교환기(TDX) 사업단장 겸 품질보증단장 △89∼90년 아시아ISDN협의회(AIC) 관리이사회 의장 △91∼92년 제9대 과학기술처 차관 △95∼97년 한국이동통신 대표이사 △97∼98년 SK텔레콤 대표이사 △99∼01년 제2대 과학기술부 장관 △01∼현재 한국인터넷청소년연맹 총재 △저서:정보화사회의 길목에 서서(하이테크정보, 93), 한국의 2001년 설계(한경, 95), 미래를 열어온 사람들(한경, 96) 외 다수
<정리=김상룡기자 sr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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