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경영>경영프리즘(39/끝)환리스크 경영

전세계적인 IT경기 침체로 수출이 격감하는 바람에 올 한해를 우울하게 보냈던 반월의 한 PCB업체는 요즘 때아닌 호재를 만나 다소 주름살이 펴지고 있다. 시름을 달래주는 요인은 최근들어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원·달러 환율상승. 연일 치솟는 원·달러 환율은 이제 1300원대를 훌쩍 뛰어넘어 1350원선을 넘보고 있다.

 월평균 수출실적이 2000만달러를 상회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원·달러환율이 5% 정도 오르면 이 회사는 앉아서 10억원 정도를 덤으로 벌게 된다. 지난 국제통화기금(IMF)당시 환율상승으로 톡톡한 재미를 보았던 기억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반면 PCB용 동박을 생산하는 A사는 반대로 원·달러 환율상승으로 죽을 맛이다. 생산비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전기동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원·달러 상승은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이익감소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올해 겨우 맞춘 영업이익이 환율상승으로 다 달아나게 됐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대규모 외환거래가 발생하는 대기업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외화로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한 대기업들은 최근처럼 급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는 원·달러 움직임은 거의 저승사자와 같다. 환율변동으로 발생하는 이자부담이 수백억원에 수천억원에 달할 수 있기 때문. 국내 대표적인 반도체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지난해 환차손으로 1800억원 정도의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지며 하이닉스도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달러로 결제되는 국제거래로 발생하는 손해는 수치로 환산되지만 직접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최근들어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있는 달러·엔화 약세 추세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특히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LCD·DVD·PDP 등 첨단 디지털가전 및 핵심 부품을 생산하는 국내 전자업체들은 엔저태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달러대비 엔화의 가치가 130엔대를 넘어서 140엔대를 육박할 경우 그만큼 이들 제품의 국제경쟁력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일본이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방편의 일환으로 엔저 기조를 계속 유지하고 미국 등 선진국들도 엔저를 용인하는 분위기기 때문에 내년에도 엔저 현상은 지속될 전망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제 엔저는 국내 전자업계의 돌발변수가 아니가 상수로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상치 못했던 환율 변수가 생기면서 국내 전자산업계의 내년 경영계획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미 삼성·LG 등 주요 대기업들은 예상치 못했던 달러 상승·엔화 약세를 고려, 내년 경영계획을 다시 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한해 세계적인 IT 경기위축으로 고전을 면치 못해온 국내 전자산업계에 환태풍이란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다 내년부터 달러·엔화와 더불어 세계 3대 기축통화로 자리잡을 유로화가 공식 통용됨으로써 국내 전자업계의 환관리는 경영의 최대 화두로 등장하게 됐다. 이제 환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수출을 늘리더라도 헛장사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 환리스크 경영시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외환과 관련, 복병은 또 있다. 바로 세계 전자시장의 신흥 강국 중국이다. 중국은 현재 자국 전자제품이 우리 및 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위안화의 절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엔저 추세가 지속되고 달러가 계속해서 오를 경우 중국도 중대 결심을 할 수 있다는 게 국제 환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즉 세계 전자시장의 공룡으로 등장한 중국이 만약 위안화를 절하할 경우 국내 전자제품의 국제 가격경쟁력은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나아가 수출 중심적 산업구조를 지닌 국내 전자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게 전자업계의 공통된 우려이다. 중국통을 자처하는 전자업계의 수출 담당 임원은 “중국 위안화 평가절하는 막연한 우려가 아니라 현실화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하다”면서 “국내 전자업계는 중국 위안화 절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면서 대응책을 세워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환문제가 국내 전자업계의 최대 경영과제로 대두되고 있음에도 불구, 지난해 혹독한 시련을 겪은 바 있는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국내 대부분의 전자업체들은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위험을 미리 방어하는 환리스크 관리(일명 hedge)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 무역협회가 국내 200개 수출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환리스크 관리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44%에 달하는 업체가 환리스크를 전혀 관리하지 않고 있다고 응답했다는 것.

 또 환리스크를 관리하고 있다고 응답한 업체 중 절반 정도는 수출입시 경제시점을 늦추거나 앞당기는 단순한 내부 기법을 이용하고 있으며 선물환거래·환변동보험·금융선물거래 등 첨단 환리스크 관리기법을 활용하는 업체는 극소수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무협의 한 관계자는 “달러·엔화에 대한 국내 기업의 대응자세는 그래도 낫다”면서 “내년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갈 유로화에 대한 국내 기업의 대응책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서 내년부터 개막될 유로화 시대는 국내 전자업계에 또 하나의 환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자업계의 진로를 가로막고 나선 ‘환 복병’을 효과적으로 퇴치하기 위해서는 환리스크 관리를 일상화하고 환율이 오른다고 수출단가를 인하해 주지 말며 나아가 환리스크 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무협은 충고하고 있다.

<이희영기자 hylee@etnews.co.kr>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