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학교나 지하철의 화장실은 낙서로 도배돼 있었다. 청소원이 열심히 지워도 자고 나면 새로운 낙서로 가득 차곤 했다. 뭔가 할말은 많은데 자신을 드러내기는 싫어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낙서를 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낙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화장실 벽이 아니라 인터넷으로 그 장소를 바꿨을 뿐이다.
한국후지쯔(대표 안경수)가 발행하는 격월간 사보 ‘꿈을 이루는 사람들(11, 12월호)’에 이런 현상을 다룬 글(화장실 담벼락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간 낙서)이 있어 소개한다.
어느 문학평론가는 인터넷을 가리켜 ‘욕망의 하수구’라고 표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나 지하철 화장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담벼락 낙서’가 인터넷이라는 익명성이 보장된 가상공간으로 옮겨간 것이다.
PC와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공공장소를 대변하던 ‘낙서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대학가 화장실을 둘러봐도 ‘○○, 결사반대!’라든가 감상적인 유행가 가사를 끄적여 놓은 몇몇 낙서를 제외하고는 이전의 화장실 낙서문화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이는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낙서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인터넷 검색엔진에서 ‘낙서’란 단어를 입력해보면 무수히 많은 ‘낙서를 위한 공간’을 찾을 수 있다. ‘S대학 화장실 유머 모음’ ‘스트레스 푸는 낙서장’에서부터 ‘직장상사 흉보기’ 사이트까지 그 다양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이버공간은 그간 화장실을 빌리던 재래식 낙서문화를 밀어냈지만 그 특징은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다. ‘익명의 ID’란 보호막 뒤에 숨어 거침없이 반말을 써댄다는 것부터 그렇고 욕설과 음담패설로 범벅인 것도 예의 낙서와 닮았다.
물론 인터넷의 모든 글이 화장실 낙서를 닮지는 않았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게시판이나 채팅 같은 경우엔 이런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인터넷 게시판은 그 형식 면에서도 낙서를 빼닮았다. 한 사람이 글을 남기면 누군가가 그 글을 읽고 나서 야유하거나 지지하는 내용을 바로 글 밑에 연이어 써넣는다. ‘리플’ 또는 ‘댓글’로 불리는 이런 답변성 글이야말로 재래식 화장실 낙서를 그대로 닮았다.
낙서란 비밀이 보장된 익명성의 그늘에 숨은 채 자신만의 ‘매체’를 갖고 싶어하는 인간 무의식의 자연스런 발로임을 감안할 때 낙서는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수천년 전 동굴 벽화에 누군가 그려넣은 벽화에서부터 시작된 낙서는 공중화장실을 거쳐 이제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바다’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정리=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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