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2일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열린 ‘남북한 한국어 정보처리 워크숍’에서는 하나의 의미있는 조직이 결성됐다. 남한 정보처리·언어 전문가들이 남북한간의 우리글(한글) 정보처리 표준화 회의에 대한 남한내의 대표성을 확고히하고 남한내 민·관의 의견을 모으기 위한 이른바 ‘남북 언어정보처리 표준화 조직’을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조직 주비위원장을 맡은 최기선 KAIST 전문용어언어공학연구센터 소장은 “남북간 우리글 정보처리의 기본요소인 한글코드·한글자모순·용어·자판의 표준화에 대해 남한내 관련 학회와 정부기관, 국제기관의 협력을 얻기 위한 실질적 업무를 관장하고, 남북 언어정보처리 표준화에 관한 인력 풀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6.15 이후 과학기술·IT분야 남북 학술교류 및 협력사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올들어서만도 과학정보기술 분야 수백명의 기업가와 학자·전문가들이 북한의 문턱을 넘었고, 남북 합작회사까지 탄생해 공동 IT기술개발·교육을 진행중이다. 얼마 전에는 평양에서 남북 IT협력단지의 첫삽이 떠졌으며 이달초 삼성전자와 조선콤퓨터쎈터가 공동개발한 ‘통일워드’도 처음 선보였다. 특히 평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조립·생산해온 아이엠알아이는 분단사상 최초로 모니터 완제품을 곧 북한에 공급할 예정이다. 게다가 남북 IT교류를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비무장지대 활용계획 등 구체성을 띤 방안들이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분위기와는 달리, 이를 뒷받침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남북 공동의 교류지원체계는 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한 대북 IT전문가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를 띠는 현 단계의 남북 IT교류 수준에 걸맞은 남북 공동의 공식 또는 비공식적 지원체계가 부족하다”며 “이 때문에 대부분의 남북 IT학술교류·협력사업 성과들이 지금까지 남북 양측에서 힘을 얻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정보처리 학술대회에서 남북 참가자들은 코드·자판·자모순·용어 부문의 공동안을 이끌어냈지만 용어 부문을 빼고는 후속작업이 진척을 보지 못하는 상태다. 남측의 한 참가자는 “이는 남북 모두 내부적으로 참석자들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데다, 정부차원의 후속지원이나 협력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결성된 남북 언어정보처리 표준화를 위한 조직 주비위원회도 이러한 현실과 지적을 반영한 측면이 다분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올들어 수십명의 남한 IT기업가들이 방북해 갖가지 협력사업을 위한 합의안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바세나르 협약과 같은 국내외 법적·제도적 장벽과 정치여건에 발목이 묶인 채 몇개월째 한발짝도 진전을 못보고 있다.
대북사업을 추진중인 한 기업 관계자는 “남북 IT협력사업을 위한 초기 접촉단계부터 남북간 합의를 맺은 이후 이를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지원해줄 만한 범정부·민간 합의기구의 부재가 남북 IT교류 확대의 한 걸림돌”이라고 지적했다. IT협력사업같은 복잡한 일을 기업의 독자적인 힘과 의지만으로 수행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서 최근 남북 공동의 IT교류 지원체계 설립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남북을 아우르는 이른바 ‘남북IT교류위원회(가칭)’ 설립안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진행돼온 남북 IT학술교류를 정례화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방안은 힘을 얻고 있다. 아울러 남북간 기술적 이질감 해소에 필수적인 표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학술·기술교류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리상춘 재일본 조선인과학기술협회 컴퓨터전문위원회 위원장은 “IT산업은 첨단기술에 의한 산업이기 때문에 경제협력과 학술교류를 병행해야 하고 학술교류는 그 특성상 계속성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이를 위해 행정조직이나 개별기업만이 아니라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의 지식인, 복수기업이 참여하는 남북 및 제3국간 협의체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정희성 선문대 교수는 “남북 IT협력을 확대해 생산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IT교류 초기에 남북 IT분야 종사자들의 협의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여기에서는 첨단기술의 동향 이해, 기술 교류·이전 등 IT 및 학술과 관련한 모든 것들이 논의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북한으로부터 전자출판에 관한 다수의 논문·저서 기증을 요청받고 이를 전해준 이기성 한국전자출판연구회장도 “남과 북의 IT전문가들이 학술교류라는 만남의 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측과 IT기술 공동개발 협의를 이끌어낸 한 기업가는 “남북 협력사업을 진행하다가 외부요소나 제도·법적인 벽에 부딪힐 경우 그동안의 노력들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며 “주변의 작은 정치적 여건 변화에도 휘둘리지 않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남북간 공식적인 협의체 설립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현재 정부차원의 지원기구와 신뢰할 만한 대북통로가 부족한 가운데 발생할 우려가 있는 기업간 과열·중복경쟁을 방지하는 것도 남북IT교류위원회에 자못 기대되는 부분이다.
아이엠알아이의 유완영 회장은 “남북 IT협력사업의 성공모델을 많이 만들어야 남북 IT교류가 힘을 얻을 수 있다”면서 “향후 큰 발전이 예견되는 IT분야의 공식적인 남북 대화창구 마련을 위해 남북은 물론 우리 내부적으로 중지를 모아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대북 IT전문가들은 분단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남북 IT교류·협력의 여건이 나아진 지금의 호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의 남북 IT교류 성과를 잇고 향후 발전을 담보로 하기 위한 ‘남북IT교류위원회’의 설치에 남북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인터뷰:김유향 국회도서관 과학기술정보통신 연구관
김유향 박사는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정보통신분야 남북 교류협력 정책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남북이 공존해야 하는 차원에서 남북IT교류위원회 설치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현 단계 남북 IT교류·협력의 문제점은.
▲기본적인 통신망 연결이 부족해 IT교류·협력을 논하는 것은 물론 그 진행에 한계가 많다. IT분야 정보도 거의 없고, 국내적으로 통합된 북한정보 획득·접촉창구 역시 부족하다. 이는 교류과정에서 과당경쟁을 낳고 교류기업의 부실화를 초래하게 된다. 게다가 남북한 상호이해의 진전을 우회한 IT교류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기 쉽다.
―이에 대한 개선방향은.
▲장기적 비전을 가진 남북한 통합 프로그램 속에서 IT교류 협력의 문제를 두어야 한다. 세계적인 IT물결에서 북한이 소외되면 정보화의 최첨단을 달리는 남한과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이는 통합과정의 비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IT부문 정보수집과 바람직한 교류방안에 대한 학술적 조사가 더욱 활성화되도록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정부의 지원을 받는 민간 비영리기관(남북IT교류협력위원회)을 통해 장단기적 목표를 세우고, 남한 기업·단체간 정보를 공유함과 동시에 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
―남북한에 요구되는 자세는.
▲북한의 변화를 전제로 해야 한다. 북한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탈피하고 ‘IT입국’을 달성하면서 해외진출 및 기술이전을 위해서는 남한과의 협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일정 정도의 북한체제 개혁과 국제교류의 활성화가 이뤄져야 한다. 남한으로서는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교류협력에 임해야 한다. 또 북한이 단순히 남한 IT기업들의 저임금 하청공장화되는 것을 막고, 남북한이 공존하면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김주진 한국통신 통신망연구소 실장
김주진 박사는 지난 9월 통일IT포럼 창립1주년 기념세미나에서 북한지역 통신망 현대화 전략에 대해 발표하고 이를 위해 남북IT교류센터(가칭) 설립을 주장한 바 있다. 그를 만나 센터 설립 필요성과 역할 등에 대해 들어봤다.
―남북IT교류센터의 설립 필요성은.
▲남북은 IT·정보통신기술·산업 수준에서 격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남한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이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는 북한의 개방과 남북관계 개선에 당장 도움이 되나, 향후 체계적이지 않은 접근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낳을 수 있다. 또한 통일 이후 한반도의 IT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남북의 각계 전문가들이 IT교류 초기부터 장기적인 비전 수립을 연구·기획하기 위한 기관이 필요하다.
―교류센터의 설립 및 구성 방안은.
▲남북이 각자의 기구를 구성하고 향후 이를 통합하는 형태가 바람직하다. 남한은 정부 주도로 관련 부처, 민간단체, IT·정보통신사업자, 학자들이 참석하는 민·학·산·정 공동기구를 구성한 뒤, 향후 이를 순수 민간단체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도 남한과 유사한 기구의 설치를 제안할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의 민간사업자(남한)-정부기구(북한)의 대화구도를 동일한 대화구도로 전환시키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교류센터의 역할은.
▲남북 IT·정보통신 교류에서 대화채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남북한에 모두 IT교류센터가 설립되면, 우선 ‘남북한 IT교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해 교류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이 협정을 기반으로 남북간의 통신회선을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데 필요한 정보교환을 비롯, 통신서비스의 종류·범위, 필요시설 구비, 통신요금 부과·정산방식, 주소·전화번호 확인, 한글코드·컴퓨터자판·인터넷주소·도메인네임 통일 등을 논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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