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요금은 매 5분 간 50전으로 한다.’
‘다른 사람이 전화를 하고자 기다릴 경우에는 10분 이상 통화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상업용 전화사업이 시작된 1902년 3월 20일, 지금의 정보통신부격인 통신원에서 인천∼한성간 전화를 개통하면서 발표한 ‘전화권정규칙’이다.
5분이 한 통화, 요금은 50전.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두 통화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지극히 간단명료한 이 규칙이, 현재 유선전화와 휴대전화를 합쳐 4000만명이 넘는 가입자를 수용하게 된 정보통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나라 전화사업 최초의 이용규칙이었다.
당시 인천과 한성간 상업용 전화가 개통되기 이전에 이미 조선정부 내의 행정용 전화가 개통되어 운용중이었다. 또한 1885년부터 실시되어 온 전신을 통한 전기통신이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단 두 항의 규칙만을 정한 채 상업용 전화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긴다. 이는 전화사업 자체를 매우 서둘러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천과 한성간 상업용 전화사업의 시작은 조선정부의 당시 재정형편 등 여러 가지 형편을 감안해 볼 때 일본의 불법가설에 대한 대항논리로서 서둘러 추진되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침탈을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통신권을 장악하는 것이 조선을 침탈하는 하나의 방안이라는 전략으로 조그마한 명분이라도 주어지면 통신선의 가설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에서는 이러한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상업용 전화사업을 시행한 것이다.
당시의 상업용 전화사업은 인천∼서울간 먼저 개통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내교환전화에서 시외전화로 발전한 것이 아니고, 시외장거리 전화가 먼저 개설된 다음 시내교환전화가 개설되어 갔다. 시내교환전화는 시외전화가 개통된 지 3개월이 지난 1902년 6월에 한성에서부터 개시되었고, 인천의 시외전화는 다음해 2월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다.
일반인들도 임의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상업용 공중전화사업은 1903년부터 본격화되었다. 그해 2월 5일 개성과 평양간 전화가 개통되었고, 한성전화소 관하에 마포 도동(남대문), 시흥(영등포), 동교(서대문) 등 4개의 전화지소와 한성과 수원간 전화개설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7월 하순에는 평양전화소와 수원에서도 교환전화가 시작되었다.
전화업무는 모두 통신원의 관장 아래 이루어진 상업용 전화였지만 이에 앞서 1899년 6월 강원도 금성(금화문 금성읍으로 현재는 미수복지)에서 금성탄광을 경영하던 독일상사 ‘세창양행’이 인천과 금성간 전용전신과 함께 전화를 개통시킨 적이 있었다. 당시 이 땅에 가설된 가장 긴 시외전화 선로인 이 전화시설은 전화기와 이에 따른 시설이 불량하여 그해 11월 전화시설을 자진 철폐하고 말았다.
당시의 전화가입자 현황은 용산전화국 내에 설치되어 있는 한국통신 박물관에 복제품으로 전시되어 있는 ‘각전화소청원인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통신원 초대총판 민상호 유품으로, 일본에 의한 통신권 피탈 당시인 1905년 5월 30일 현재 각 전화소별 가입자의 성명과 주소, 가입 연월일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각전화소청원인표’에는 당시 전화가입자수를 서울 50명, 인천 28명, 수원 1명, 시흥 1명 등 총 80명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외국인이 상당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업용 전화사업의 운영을 위한 현업기관으로 각 지역마다 전화소가 설치되었다. 한성과 인천간 전화개통 당시 통신원령 제1호에서 전화사무소라 칭하고 ‘한성전보사와 인천전보사에 고위권설함이라’하였는데, 고위권설이라 함은 ‘우선 임시로 설치한다’는 뜻으로 전보사에서 임시로 전화업무를 수행한 듯 하다. 1902년 4월 28일 공표된 ‘전화규칙’에 비로소 전화소, 전화지소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때 전화소와 전보사는 관인도 따로 쓰고 있다.
‘전화규칙’에 이어 만들어진 ‘전화세칙’을 보면 청원료는 오늘날의 가설료와 사용료를 병합한 것으로, 매년 100원을 6개월마다 50원씩 분납하도록 되어 있었고, 전화소에서 3리 이상 떨어진 곳의 가설은 매 1리에 60원을 추가로 받도록 하였다. 또한 등부료는 지금의 가입등기료에 해당하는 것으로 15원이었고, 통화업무 취급시간은 상오 7시부터 하오 10시까지였으며, 통화료는 가입자와 비가입자간, 비가입자와 가입자간, 비가입자 상호간이 다 같이 매 5분에 50전이었다.
요금은 선납제에 불환불을 적용, 통화 전에 납부하고 일단 납부된 요금은 환불하지 않았으며, 통화시간은 ‘전화권정규칙’에서처럼 통화할 사람이 대기할 경우 10분 이상 할 수 없었다. 또한 모든 요금이 납기 10월을 경과할 때에는 기기를 철거한다는 규정도 있다.
이밖에 통화 중에 저속한 언어를 사용하거나 서로 언쟁을 할 때에 전화소에서 이를 정지시킬 수 있는 규칙도 있었는데, 일일이 전화의 내용을 감시할 수 없었던지 나중에는 공중전화마다 전화의 통화내용을 감시하는 감시자들을 한 명씩 두어 전화통화 내용을 감시했다. 공중전화 감시자들은 전화를 거는 사람들의 ‘말’을 감시하는 사람들로, 저속한 언어나 언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전화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공중전화 감시자들은 이후 조선 내에서 상업을 하는 외국인들이 통화내용이 누설되어 영업비밀이 노출된다는 강력한 항의가 있자 외국인들이 통화를 하는 경우에는 통화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내국인이 통화를 할 때 다시 가까이 다가와 통화내용을 감시하곤 했다.
현재의 공중전화 옆에서 한 사람씩 그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사람을 감시한다는 생각을 해보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일이지만, 100년에도 전화를 통해 오고가는 말을 감시하는 감시자까지 둔 것을 보면 현 시대에서도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전화 폭력이 당시에도 심각하게 존재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질과 성격은 다를지언정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로 말소리를 높이고 상스러운 말을 하며, 엉뚱한 곳에 전화를 걸어 엉뚱한 말을 해대는 것은 전화의 특성상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서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통화할 수 있는 전화가 상용화될 예정이지만 그에 앞서 기존 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발신자정보제공서비스(CID)도 그러한 이유에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폭력성을 띠지 않고 남에게 전화를 걸 때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보가 노출된다는 것은 발신자 측에서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부재중에 걸려온 전화의 전보를 확인하고 전화를 해주어야 하는 지도 망설이게 되고, 만일 사정이 변하여 통화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도 착신자 측에서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의도가 노출되는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다.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간혹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전화였지만, 이제 함부로 전화 다이얼을 돌리지 못하고 그리움만 키우고 또 키우는 현 시대의 전화가 안타깝기도 하다. ‘발신자 표시제한’이라는 문구 대신 ‘사랑의 전화’라고 표시되는 서비스 제공도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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