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정보산업의 시대다. 인민경제 모든 부문을 정보화하자.’
본지 특별기획취재팀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여러 곳에서 이같은 포스터 문구가 눈에 띄었다. 북한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연구개발 싱크탱크 중 하나인 평양정보쎈터(PIC) 최주식 총사장의 집무실에는 김정일 위원장이 보냈다는 ‘전자계산기화는 기술혁명의 높은 단계입니다’로 시작되는 글이 걸려 있었다.
또 얼마전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에는 ‘정보기술 인재양성사업을 강화하는 것은 강성대국 건설의 지름길’이라는 제목아래 ‘현재 정보기술·정보산업의 발전없이는 강성부흥을 생각할 수 없다. 각 분야에서 이를 널리 받아들여 강성대국 건설을 실현해 나가자’는 기사가 실렸다. 앞서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해 중국 상하이의 푸둥지구를 둘러본 뒤 “20세기는 기계산업의 시대며 21세기는 정보기술산업의 시대다. 앞으로 정보기술산업의 발전없이 경제발전은 없다”며 IT산업 육성에 대한 의지를 압축해 웅변했다.
북한이 이처럼 IT를 주력산업으로 선택한 데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북한은 우선 IT가 경제 회생의 대안이며 기초과학 기술분야에서의 경쟁력을 고려할 때 세계 수준을 단기간에 따라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체제변화 없이도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해법은 IT산업 육성이라는 판단아래 IT산업으로 단번에 도약해 경제난을 해결하겠다는 의도다. 이는 경공업·중공업 발전단계를 지나 IT산업에 도달한 중국이나 혼란·시행착오를 겪은 러시아와 달리 IT산업을 통해 곧바로 경제회생의 길로 가겠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다.
이와 관련, 로동신문은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서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높이에서 보고 풀어 나가자’며 이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 ‘신사고’ 개념의 핵심에는 IT산업을 통한 새로운 경제발전 전략이 자리잡고 있다.
이를 놓고 볼 때 북한이 대남 IT교류협력에 본격 나서고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북한은 IT산업 육성을 경제난 극복을 위한 돌파구로 인식하고 지난해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대남 IT협력사업에서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북한이 IT육성에 어느 정도의 의지를 갖고 있는가는 최근 몇달 동안의 남북 IT교류 과정에서 쉽게 감지된다.
지난 2월 첫교섭이 시작된 지 불과 5개월여 만에 중국 단둥에 남북 첫 IT합작사 ‘하나프로그람센터’가 출범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또 조만간 평양 근교에 남북 합작 IT협력산업단지가 착공을 앞두고 있을 정도로 이전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남북간 IT교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대남 IT협력사업의 전면에 민족경제협력련합회 등을 내세워 실질적으로 정부차원에서 나서고 있다.
하나프로그람센터 출범의 산파역이었던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은 “남북의 앞선 정보기술을 접목할 구상으로 지난해 7월 북쪽에 IT사업 의향을 밝힌 결과 호응이 있었다”며 “북이 남측과 IT사업을 하려고 하는 것은 큰 변화”라고 강조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IT교류 협력사업이 남북 양쪽에 가장 현실적이고 생존적인 접근방법이라는 인식속에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즉 북측의 기초과학 기술 및 인력을 남측의 자본력·상용화 기술과 합칠 경우 커다란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남북 당사자들의 이해와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남한과의 IT교류에 본격 나선 배경에는 타 국가들과는 제반 상황에서 협력사업이 힘든데다 IT분야에서 남한의 강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또한 북한은 남한으로부터의 경제지원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 특히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직접 투자 외에도 정보기술 도입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북측은 올들어 남북경제협력 교류수준을 기존 단순 임가공에서 탈피, 기술이전이 수반되는 IT교류협력으로 확대해가고 있다.
하나프로그람센터의 남한측 파트너인 하나비즈닷컴의 문광승 사장은 “진작 남북 IT협력사업에 착수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만시지탄의 느낌을 받을 정도로 이에 대한 북한의 의지는 매우 높다”고 말한다. 평양에 IT협력산업단지 설립을 추진중인 엔트랙의 임완근 사장도 “IT협력에 있어 북한은 남한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은 대남 IT교류가 단기간에 성과를 거두고 수익도 내면서 경제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을 한 듯하다”고 말했다.
결국 앞으로 북한은 체제변화없이 개방의 폭을 최소화하면서 IT산업 육성과 대남 IT교류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한이 남쪽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선진기술을 익히도록 함으로써 경제회생의 길로 나서게끔 유도하는 작업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남북 IT교류가 어느 한 쪽만 손해를 보거나 수혜를 받는 게 아니라 상호 호혜적이고 정보격차를 줄이면서 민족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표> 북한 정보기술 산업 관련 일지
△1984년 김일성 주석 유럽 순방, 전자분야 기술협력계약 체결 및 인력파견 지시
△1985년 4년제 컴퓨터 인력양성 전문기관인 조선계산기단과대학 설립
△1986년 평양프로그람쎈터(현 평양정보쎈터·PIC) 설립
△1990년 조선콤퓨터쎈터 설립
△1988∼91년 제1차 과학기술발전 3개년 계획
△1991∼94년 제2차 과학기술발전 3개년 계획
△1995년 평양시 은정구역 과학자지구로 지정
△1998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전국 컴퓨터 프로그람 경연 및 전시회’ 시찰 후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촉진 지시
각급 중고등학교 컴퓨터교육 시작
△1998년 8월 광명성 1호 시험발사
△1999년 김정일 위원장, 신년 첫 현지지도로 과학원 방문
‘과학의 해’로 지정
김일성종합대학내 컴퓨터과학대학 설립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전자계산기대학내 프로그램학과 설립
정보통신부문 전담할 ‘전자공업성’ 발족
△2000년 사상·총대·과학기술을 강성대국 건설의 3대 기둥으로 지칭
△2000년 5월 김정일 위원장, 중국 베이징 소재 중관춘 방문
△2000년 6월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2001년 1월 김정일 위원장, 중국 상하이 푸둥지구 방문
△2001년 5월 남북 첫 IT합작사 ‘하나프로그람센터’ 중국 단둥에 설립
8월 하나프로그람센터 개발 및 교육센터 업무 착수
△2001년 10월 평양에 남북합작 IT협력산업단지 착공 예정
서재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하와이대에서 사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과 통일정책연구실장 등을 역임한 북한 전문가다. 그는 최근 북한전문서적 ‘식량난에서 IT산업으로 변화하는 북한’을 펴낸 바 있다.
―북한이 정보기술산업을 주력산업으로 삼고 이를 육성에 나서게 된 배경은.
▲그동안 외연적 경제성장에 주력했으나 생산요소들의 고갈로 궁지에 직면했다. 90년대 들어 나진선봉경제특구를 설치해 외자유치를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이제는 과학기술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주로 소프트웨어 기술을 경제에 접목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존의 생산재에 자동화, 정보화를 도입해 생산성을 높이는 전략이며 다른 하나는 프로그램 수출상품 개발이다. 북한은 정보기술은 체제변화없이도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을 느끼고 있다.
―대남 IT교류 협력에 적극성을 보인 까닭은.
▲바세나르협정 때문에 IT교류를 할 수 있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제한돼 있다. 따라서 남한이 북한에 적극적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이 교류가 진전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인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대북포용정책, 앞선 기술과 자금력, 같은 민족이라는 여러 긍정적인 요인 때문에 북한은 남한의 접근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향후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기업이 북한에 접근할 경우에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IT교류사업의 향후 전망과 발전 방안은.
▲남한 기업들이 북한 진출을 희망하는 것은 남한의 고임금과 IT인력의 높은 유동성 때문인데 현재로서는 남북간 이해관계가 상호합치되고 있다. 이럴 때 상호 유기적 의존성이 심화되도록 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북한의 체제변화없이 IT산업을 추진하고자 하는 의도가 확고하므로 체제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품목의 IT협력을 장려할 필요가 있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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