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9월 24일.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해군기지에서는 14발의 예포가 울렸다. 이어 줄지어 늘어선 미 수병들의 한 가운데를 이상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걸어 들어왔다.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채 도포를 입은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 당시 조선의 강화도 공격에 참여했던 콜로라도 호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어 보빙사 일행은 마차를 타고 브로드웨이로 내려갔다. ‘은자의 나라’에서 온 진기한 옷차림의 사람들에 관한 연이은 신문보도로 호기심에 가득차 있던 뉴욕 사람들은 그들을 보기 위해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구경꾼들로 인해 뉴욕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브로드웨이는 마차가 움직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럽게 구경 인파를 뚫고 보빙사 일행이 방문한 곳은 유니온 전신회사였다. 그들은 거기서 전기와 그 전기를 이용하여 통신을 수행하는 전신기의 효용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기도 물처럼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겨 부을 수 있으며, 통제하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고, 그 전기를 활용해 멀리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며칠 후 10월 15일자 ‘뉴욕헤럴드’에는 보빙사 일행의 유니온 전신회사 방문기사와 함께 일행 중 한사람의 이야기를 빌어 조선 젊은이의 기개를 보도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전기를 이용하여 행하는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의 석유나 가스를 이용한 것보다 편리하고 좋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시험을 해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이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움을 극복하고 ‘우리는 당신들이 도달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라고 미국 기자들에게 자신있게 외친 젊은이, 그가 바로 미국과 유럽을 살펴본 내용을 ‘서유견문(西遊見聞)’을 통해 일반인에게 알린 유길준이다.
유길준의 혁명적 기개는 계속 미국에 남아 유학하기로 결정된 후 곧바로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도포를 벗어버리고 양복을 입은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스로에게 충격과 추진력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또한 을미사변 이후 참여한 김홍집 내각에서의 활동에서도 그의 혁명적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1896년 김홍집 내각에서는 음력철폐와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리고 관리들로 하여금 가위를 들고 거리나 성문 등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했다. 머리와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상(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유교의 가르침에 젖어있던 민간인들에게 단발령은 가히 혁명적 조치였다. 많은 선비들이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는 없다’고 분개하여 일본에 치우친 내각에서 강행하려는 단발령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인해 배일 감정이 극도에 달한 때라서 그 저항의 심도는 더욱 거셌다. 국민들은 의병을 일으켜 정부시책에 대항했고, 정부에서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진압했다. 하지만, 국왕이 밤에 몰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에 의해 김홍집 내각은 무너졌고 피살된 김홍집의 시체는 종로바닥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다.
그 사건의 핵심에 유길준이 있었다. 내무대신. 무리하지만 단번에 온 민중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혁명적 방안을 택했던 유길준은 그 사건으로 일본으로 긴 망명의 길을 택해야 했고 조국의 개화에 대한 꿈도 접어야 했다.
유길준이 보빙사 일원으로 인천항을 출발한 것은 1883년 여름이었다. 보빙사 일행을 태운 ‘모노케시’호가 푸른 파도를 헤치고 인천항을 출발했을 때 멀어져 가는 조국산하를 바라보던 유길준은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다. 그가 타고 있는 배가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공격했던 그 미국 군함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는 기대감과 그를 통해 조국을 개화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기도 했다.
보빙사 일행이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883년 9월 2일, 인천을 떠난 지 38일 만이었다.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고, 당시 미 대통령 아더를 만나 신임장을 전해 주는 등 바쁜 날들을 보낸 일행은 조선을 대표한다는 생각에 체통을 지키며 새로운 세계에서 피곤도 잊은 채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유길준의 눈에 비쳐진 미국은 모든 것이 신비로웠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와 각종 제도, 기계화된 산업 등 말로만 듣던 새로운 사회를 직접 보고 겪게 된 놀라움은 매우 컸다. 그 놀라움은 곧 조국의 개화와 연계되었고, 그 생각들을 유길준은 ‘서유견문’에 기록하고 있다.
‘서유견문’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서양 각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군사, 사회, 교육, 과학, 학문 등 광범위한 문제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개화사상을 집대성한 최초의 본격적인 국한문 혼용서로도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서유견문’에는 전신기와 원어기(遠語機)에 대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다음은 ‘서유견문’ 제18편에 증기기관, 기차, 기선 등과 함께 실려있는 전신기와 원어기(전화기)에 대한 일부 내용이다.
“전신기는 전기를 철선에 통하여 먼 곳까지 소식을 전하는 기계다. 그 현묘한 이치와 신기한 편리를 조잡한 식견과 모호한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각지로 철선을 통하게 하는 방법을 보면 길가에 삼·사십간씩 거리를 두고 십여척 또는 팔구척의 나무기둥을 세우며, 그 위에다 전선을 가설한다. 물 밑바닥에 가설하는 법은 전선의 표면을 굳게 싸서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는다. 오늘날 서양 여러나라에는 전신선이 바다와 육지에 종횡으로 깔려 있는데, 커다란 거미가 공중에 그물을 쳐 놓은 것과도 같다. 새롭고 신기한 이야기를 전하고 긴요한 소식을 서로 통하는 등, 공사간에 편리해진 일들을 하나하나 들 수가 없다. 서양 사람들이 과장해서 말하기를 ‘전신기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 뒤부터 온 세상이 한집안이 되었다’하였는데, 실상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유길준은 1881년 1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유길준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귀국하지 않고 계속 일본에 남아 공부를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관비 유학생이 되었다. 그는 일본유학 시에도 전기를 이용한 통신매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학 중에 발생한 임오군란의 소식을 일본과 부산간 연결되어있던 전신을 통해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유길준은 계속 남아 유학생활을 하게 되는데, 김옥균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소식을 듣고 학업을 다 마치지 않고 유럽을 거쳐 귀국했다. 갑자기 귀국한 사유는 여러 각도로 유추가 가능하지만, 갑신정변에 관한 소식을 전신기를 통해 전송된 신문을 통해 알게된 것으로 정보통신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며 그에 대한 상세한 관찰이 있었을 것이다.
‘서유견문’에 기록된 정보통신에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과 유길준의 파란만장한 생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 거론한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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