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19)호동왕자와 자명고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자리한 용산전화국 2층과 3층에는 한국통신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1993년 9월 28일 개관한 한국통신박물관에는 통신의 발생, 전기통신 이전의 통신수단, 한국전기통신의 역사, 전화기의 발달과정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통신 박물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이 커다란 북이다. 용고(龍鼓). 직경 1.5m, 길이 2m의 대형 북으로 북통에 화려한 용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 북은 개관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송산 윤덕진씨가 제작한 작품으로, 북채로 두들기면 매우 강력한 소리를 낸다.

 소나무 여러 조각을 모아 짠 통에 가죽을 씌우고 채로 두드려 소리를 내는 북은, 고대로부터 소리를 내는 대표적 기구로 사용되어 왔다. 동물의 피막(皮膜)을 이용하기 전에는 목고(木鼓) ·죽고(竹鼓) 등이 쓰였는데,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역사도 오래되고 세계 모든 지방에서 그 발생을 볼 수 있다. BC 3000년 고대 오리엔트의 조각에는 피막을 씌운 큰북이 새겨져 있으며,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조각에도 북이 새겨져 있다.

 북은 악기로서의 쓰임은 물론이고 통신수단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특히 전시(戰時)에 많이 사용되었는데, 고대 중국의 병법에는 군대의 진군 시에는 북을 치고, 후퇴 시에는 징을 울리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이는 사람의 심장소리와 가장 비슷한 소리를 내는 북소리로 군사가 두려움을 잊고 돌진하게 하는 전진 신호의 의미를 전달하는 통신용으로 이용한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 북과 그를 통한 통신행위는 여러 문헌에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를 중심으로 지어진 ‘삼국사기’에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어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비의 북 자명고(自鳴鼓)에 대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는 1145년(고려 인종 23년) 국왕의 명령을 받은 김부식의 주도 아래 8명의 참고(參考)와 2명의 관구(管勾)가 편찬하였다. 이들은 자료수집과 정리작업을 함께 했지만 머리말, 논찬(論贊) 및 사료의 선택, 인물의 평가 등은 김부식이 직접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에는 “사대부가 우리 역사를 잘 알지 못하니 유감이다. 중국 사서는 우리나라 사실을 간략히 적었고, ‘고기(古記)’는 내용이 졸렬하므로 왕·신하·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규범을 후세에 남기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편찬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자명고에 관련된 내용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편’에 나타난다. 여기에는 자명고와 함께 사랑을 위해 자명고를 찢어버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에 얽힌 애틋한 사랑과 비극도 기록되어 있다

 단기 2365년(서기 32년) 임진년. 신라는 유리임금 재위 9년으로 회소가를 부르는 한가위 명절이 생긴 해였고, 백제에는 온조가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다루왕 5년이 된 해였다. 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한(漢)나라의 지배를 받는 한사군의 낙랑국을 빼앗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대무신왕에게는 아들 호동이 있었다. 호동왕자는 심성이 어질고 보는 이로 하여금 한눈에 반하게 만드는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왕가는 물론 백성들도 출중한 그의 자태를 흠모하며 자랑스러워했는데, 호동의 마음 속 깊이 담겨진 담력과 언변도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큼 뛰어났다. 그 해 4월, 1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지혜로웠던 호동은 낙랑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같은 민족인 옥저와 힘을 합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행을 떠난다. 옥저와 동맹을 맺기 위한 여행이었다. 호동은 낙랑의 변방인 지금의 함흥 지역에 이르렀을 때 사냥을 나온 낙랑태수 최리와 우연히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의 준수한 모습에 반하여 자기의 나라로

들어갈 것을 권하고, 호동도 이에 응하게 된다.

 낙랑의 왕에게는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낙랑공주였다. 동갑내기인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는 한눈에 서로 반하여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에게 청혼을 하고, 낙랑 태수에게 허락을 받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듯이 낙랑공주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우는 자명고가 있어 낙랑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국가 비밀을 호동왕자에게 말하게 된다. 자명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호동은 자기의 왕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고구려로 돌아오게 된다. 낙랑의 자명고는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울어 위험을 알려주는 북으로, 적이 침입한다는 정보를 조기에 알려주는 통신경보 시스템 역할을 수행하는 매체였다.

 호동은 낙랑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그 자명고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낙랑으로 몰래 보낸다. 낙랑공주에게 자명고를 찢어야만 영원한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린 것이다. 사랑하는 호동왕자의 전갈을 들은 낙랑공주, 심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사랑의 힘에 이끌려 예리한 칼로 자명고를 찢어 버리고 그 소식을 호동에게 전하게 된다. 자명고가 찢어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호동은 즉각 군사를 몰아 낙랑을 공격한다. 낙랑은 자명고가 울지 않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무너지고 만다. 낙랑의 태수 최리는 자명고를 찢은 사람이 자기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해 공주를 살해하고 항복하게 되니 정신없이 낙랑공주를 찾던 호동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사랑하는 사람의 주검을 끌어안아야만 했다.

 국가 안보의 절대적 통신 매체인 자명고를 찢어 낙랑의 경보통신망을 무너뜨린 고구려는 낙랑군을 무찌르고 우리 땅에서 한나라의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개선장군이 되어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에게는 슬픔만 있을 뿐이었다. 백성들은 민족의 기상을 드높인 영웅으로 칭송했지만 호동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묻어둔 사랑하는 낙랑공주의 생각 뿐, 호동의 눈에는 늘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자명고로 인한 호동의 비극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해 11월, 대무신왕의 원비(元妃)는 호동을 내전으로 불렀다. 원비는 호동을 위로하는 척 하다가 품에 안기자 불현듯 표정을 바꾸며 “예로써 나를 대우하지 않고 내게 음란한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하다”고 외쳤다. 호동은 왕의 차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데, 원비는 호동이 대무신왕의 대를 이어받아 왕이 되는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왕은 “타인의 아들이기 때문에 미워하느냐”고 되묻지만 황비가 눈물을 흘리며 재차 호동이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자 왕도 호동에게 죄를 묻게 된다

 이때 호동은 “내가 만약 해명을 한다면 이는 왕비의 악함을 드러내는 것이 되고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도라 하겠는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랑하는 낙랑공주의 곁으로 찾아가고 만다.

 호동왕자와 자명고. 설화가 아닐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일 수 있다. 고구려의 안악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북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듯이, ‘삼국사기’를 자신있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문에 호동왕자와 자명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낙랑공주로 하여금 국가안위 통신시스템이었던 자명고를 찢게 한 사랑의 힘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을 애틋하게 적시고, 민족의 기상을 되찾기 위해 사랑을 볼모로 내몰 수밖에 없었던 호동왕자의 아픔은 고구려의 그 넓은 땅과 역사를 이제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역사의 북소리가 되어 둥둥,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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