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쫓기고 일본은 따라잡기 힘들고.’
중국과 일본 사이어 끼어 이렇다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해 표류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국내 수동부품업계의 현주소다. 국내업체들은 돌파구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생산시설 이전을 서두르는 한편, 국내에는 연구개발부문을 강화하는 전략을 취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가 제대로 자리잡기도 전에 불어닥친 불황의 찬바람은 ‘산업공동화 현상’을 우려케 하고 있다.
콘덴서업체 S사의 O사장은 “원가절감을 이유로 중국에 생산시설을 이전한 것까지는 좋았다 쳐도 기술기반이 없는 상태에서의 중국진출은 빛좋은 개살구”라며 “이대로 가다가는 10년 뒤 국내 수동부품산업은 껍데기만 남을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경기침체의 장기화는 폭우에 드러난 낡은 축대처럼 오래된 문제들의 심각함을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국내 수동부품산업을 둘러싼 구도는 더욱 복합화되어, 국내업계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현재 중국 주요 부품업체(외국투자자본 포함)들은 매달 80억여개의 적층세라믹칩콘덴서(MLCC)를 쏟아내고 있고 5억개의 칩인덕터, 100억개 정도의 칩저항을 생산하는 상황이다. 일본 무라타·TDK·도코·다이요유덴 등 부품업체들은 지난해 100% 가량의 설비증설을 완료, 공급과잉에 시달리자 대대적인 가격하락 공세를 펼치고 있다. 여기에다 일본 주요 수동부품업체들은 중국·태국·말레이시아 등으로 생산설비를 이전하고 있어, 물량 및 가격인하 공세를 더욱 거세게 펼칠 태세를 보이고 있다.
이른바 ‘중국=가격, 일본=기술’로 이분법적 구도를 지녔던 세계 수동부품산업 구도가 중국의 급격한 양정 팽창과 일본업체들의 가격하락 공세가 맞물려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국내 수동부품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우선 부품소재 관련 기초학문 기반의 취약성을 들 수 있다. S대 화학과 A모 교수는 전해질 관련 연구를 가지고 정부가 지원하는 9년짜리 프로젝트에 4번 도전했지만 끝내 과제선정 심사에서 탈락했다. A교수는 평가성적에서 수위를 차지했음에도 15개 중 7개를 선정하는 최종결정에서 고배를 든 것. A교수는 “학계에서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자조적 반응을 보이며 “학회 규모만 따져봐도 1000∼2000여명이 기본인 컴퓨터공학 관련 학회에 비해 화학관련 학회는 회원이 400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일본의 화학 관련 학회는 우리나라의 10배 가량 된다.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도부터 차이가 나니까 산업의 차이도 나는 것”이라는 게 A교수의 지적이다.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한 부품소재업체의 경영체제도 문제점의 하나다. 알아주는 소재전문업체인 D사는 절연재·도전재·무기재·단결정 등을 두루 생산하며 국내 내로라하는 부품업체와 거래하지만 매출규모는 200억여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 듀폰이 독점 공급해온 감광재를 국산화, 한껏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 회사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했다. 감광재 국산화 소식이 알려지면서 미국 듀폰이 감광재 가격을 50% 가량 떨어뜨린 것. 부품업체야 국산화의 덕을 보지만 D사에 돌아올 몫은 사실상 전무한 상태라는 것. D사 연구소장은 “소재 전문업체가 뿌리내릴 수 없는 산업환경에서 부품업체의 경쟁력이 생길 수 있겠느냐”며 “현재 50% 가량 된다고 하는 국산화율도 원재료를 수입해 블랜딩만 한 소재를 국산으로 친 것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국내 수동부품산업의 소재 국산화율은 30%를 밑돌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산장비산업의 취약성도 국내 수동부품산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부품업체인 S사는 최근 어렵게 첨단 정밀부품에 투자했다. 그러나 공장 생산라인 구축은 당초 계획보다 6개월 이상 지체됐다. 왜냐하면 관련 국산장비가 전무해 모두 일본에서 수배해야 했기 때문. 시장선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부품시장의 특성상 투자시기의 지체는 상업의 실패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첨단부품 생산을 위한 장비를 일본에 주문하자 일본 경쟁업체가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 생산장비의 한국 반출을 방해, 투자시기의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 S사의 설명이다.
전자부품사업에만 전념해온 옛 대우전자부품의 한 임원은 “형광등 하나도 우리기술로 만들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일본에 처지는 것은 물론 10년 안에 모든 부품산업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국내 수동부품산업은 이제 다시 새틀을 짜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김용석기자 ysk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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