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894년 9월 22일. 일본은 그들이 가설한 군용통신선의 불법성을 조금이라도 불식하기 위해 한성과 인천, 한성과 부산간 군용통신선으로 공중전보(公衆電報)를 취급할 용의가 있다고 조선정부에 제의했다. 조선정부에서는 곧 응낙하였지만, 일본은 11월 15일에 가서야 실제로 업무를 개시했다.
일본 군용통신선의 일반인 이용 제안은 결코 조선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키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군용통신선에 의한 일본인들의 전보취급을 합법화해 일본의 출정 군인이나 거류민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물론 전보는 일본글자에 국한되어 한글이나 한문의 전보문은 접수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 군용통신시설은 조선에 아무런 편의를 주지 못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직접 이용할 수도 없는 외국군의 통신시설을 보호, 유지하기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더욱이 그 시설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침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일본의 침략행위를 타도하려는 민족 저항세력을 유린하고 강압하는 도구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통신선을 파괴하고 절단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한편, 청일전쟁 당시 청국이 일본에게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참패를 당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이었을까.
청일전쟁 당시 청국 군사조직의 실권자이며 지휘자였던 이홍장은 조선문제로 분쟁 발단 직후 평화해결을 주장, 온힘을 외교 쪽에 쏟아 영국과 러시아의 중재로 일본의 전쟁도발을 막으려 했다. 따라서 군사적 측면에서는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다. 갈 때는 가지 않고, 가면 안될 때 가서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전쟁 개시 전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온 섭사성이 아산에 주둔해 있던 청군을 인천으로 이동시켜 일본군의 침입을 막자고 건의한 바 있으나 이홍장은 듣지 않았다. 군사를 해로로 수송하여 마산포에 상륙, 아산의 청군과 합류하여 한성으로 진격하고 다른 한편으로 군사를 의주, 평양에서 남하시켜 남북협공을 실시, 단숨에 일본군을 축출해 버리자고 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당시 청국의 세관총세무사인 샤델은 비밀전보를 이홍장에게 보내 정여창에 명령하여 일본의 나가사키가 비어있으니 이를 틈타 북양함대를 파견, 나가사키를 기습하게 하라고 했다. 일본의 허를 찔러 일본군을 곤경에 빠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제안이었으나 이홍장은 이 제안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국의 조정에서도 이홍장에게 양방면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오로지 외국의 중재만 믿지 말라고 거듭 요구하면서 시간을 지연시켜 출병의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촉구했다. 당시 이홍장이 적극적 전투준비와 조선에 파견된 장수들의 남북협공 건의를 받아들여 실행하였다면 전쟁은 매우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청국은 일본에 대패하고 말았다. 정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가 자신의 60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벌인 건축행사에 방해가 될까봐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고 이에 따른 외교 중시정책으로 인한 소극적인 타협, 근대적인 지휘 능력을 지닌 지휘관의 부족, 조선에 투입된 군대의 자질 저하와 무기의 낙후 등 전쟁 패인으로 꼽을 수 있는 요인이 있겠지만, 좀더 구체적인 요인 하나는 통신의 활용성이었다.
일본은 전쟁시작 전에 이미 군대상륙과 동시에 부산과 인천에서 한성까지의 통신선 가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 도로와 병참의 수송에 대한 계획과 함께 통신망 확보를 위한 별도 계획을 수립, 전 부대에 숙지를 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청국은 자신들이 운영하고 있던 통신선의 운영과 관리에도 소극적으로 대처, 전쟁 수행에 대한 통신의 활용성이 미약하여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이는 곧 전쟁의 패배로 이어진 것이었다.
청일전쟁 후 조선 침탈을 위해 일본의 조직적인 만행이 더욱 구체화되자 일반 국민들의 통신선 파괴 행위도 더욱 심해졌다. 1894년은 물론이고 을미사변이라 일컬어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난 1895년, 대대적인 의병활동이 있었던 1907년 이후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이에 일본에서는 통신선 절단을 금하고, 그 범인의 엄단을 조선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통신선 파괴 행위는 처음 동학농민군의 영향하에 있던 남로전선에만 해당되었지만, 일본이 조선 내 대부분의 통신시설을 관리하게 된 후부터는 그 절단사고가 광범위해지고 더욱 심해졌다. 1894년 9월 중 황해도에서는 봉산인(鳳山人) 장원석이라는 사람이 통신선을 절단하였다는 혐의로 국가반역죄인에게 가하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11월에는 통신선 절단사고가 발생하면 마을사람 전체에 연대책임을 물게하여 절단사고를 방지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본 군용통신선 파괴행위는 통신선의 단절뿐만이 아니라 전공(電工)의 활동에 대한 저지행동으로도 나타났다. 지방에 파견된 일본 전공을 투석으로 상해하거나 여관에서 숙박을 거절하는 등의 사태가 종종 발생하였다. 일본 공사관에서는 이러한 행동을 금지시켜 줄 것을 조선정부에 요구하였고, 이에 따른 교섭도 끊이지 않았다.
일본은 군사적 우세를 배경으로 통신선의 절단사고를 구실로 삼아 1895년 2월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통신사업 전체를 뿌리째 탈취해 가려고 획책했다. 조선 국내의 기존 통신선 및 장래에 건설하는 일체의 통신선에 대한 관리와 그 업무를 대신함으로써 조선의 정보통신사업을 송두리째 탈취하려는 의도였다.
조선에서는 서로전선의 가설과 관리를 청국에서 행할 때 일본이 이를 몹시 비난하였는데, 이제 일본이 도리어 조선의 통신선을 전적으로 관리하겠다함은 천부당만부당하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는 강압적인 자세로 강제 침탈을 계속 시도하다가 1895년 8월 발생한 을미사변으로 조선 내 일본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그 불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방안으로 일본 군용통신선을 조선에 고가로 매입하게 하고, 비밀조약을 맺어 이후 비상사태 발생시 언제든지 통신권을 전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으나 계약체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은 이러한 사항에 대해 일본 본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되도록 영문전보만을 사용하여 기밀누설을 방지하려 노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대부분 공식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쟁의 책임을 물어 청국으로부터 요동반도, 대만, 팽호도(澎湖島)를 할양받고, 고평은(庫平銀) 2억냥을 지불 받기로 한 일본은 전쟁종료 후 조선 내 정보통신 관리기구의 개편과 통신선로의 환수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일시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았고, 조선정부의 정보통신권 반환 요청에 대하여 비 협조로 일관하여 오다가 1896년 7월 조선 내에 전보사가 설치되고 전신사업 재개 방침이 확정된 때 마지못해 통신권을 조선에 반환했다.
인천 앞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송도의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는 청일전쟁 당시 풍도 앞 바다에서 침몰된 청국 군함에서 인양했다는 청동제 종(鍾)과 칼 두자루가 전시되어 있다. 그 옆으로 러일전쟁 당시의 유물로 몇 개의 대포알과 포탄뚜껑, 총 등이 빈약하게 전시되어 있다. 울도 앞 바다 밑에 자리하고 있다는 ‘고승호’에서 많은 유물이 인양되어 역사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고, 은괴도 산더미처럼 건져 올려 보물선의 꿈도 현실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멀리 바다를 바라본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한국통신 과학관장)
<고은미부장 emko@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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