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원천기술로 기술주권 회복을

정병철 LG전자 사장(bcjung@lge.com)

우리의 디지털기술이 세계시장에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디지털 정보가전의 총아로 떠오른 디지털TV 분야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주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앞서가고 있다.

이미 디지털TV 수신용 칩세트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바 있고, 디지털TV의 전송방식인 VSB 원천특허 등 핵심기술도 상당수 확보하고 있다. 동영상 압축기술인 MPEG2 특허풀에 참여하는 등 기술표준 경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지금이 본격적인 디지털시대가 열리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디지털TV는 우리의 기술이 세계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전자산업 전반을 돌아보면 아직도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기술이 산업의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쉽게 눈에 띈다.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원천기술에서 우리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것이다.

일례로 CDMA 기술은 우리나라가 종주국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분야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명성을 얻는 동안 미국의 퀄컴사는 가만히 앉아서 한국의 이동통신기기 업체들로부터 막대한 로열티 수입을 벌어들였다. 원천기술에 대한 대가로 엄청난 실리를 취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일본을 누르고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DVD플레이어 역시 로열티 문제가 결부돼 있다. 적지 않은 원천기술을 일본과 유럽의 선진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어 자칫 CDMA의 사례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업계의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이 역시 원천기술이 문제다.

그동안 한국의 전자산업은 생산기술력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해 왔다. 뛰어난 생산기술력은 후발산업국인 우리나라가 세계 6위의 전자산업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기술력이 주도하던 과거와는 다르다. 조립완제품 시장은 중국 및 동남아 국가들의 저가정책 때문에 경쟁력을 위협당하고 있고, 고부가가치 제품에서는 브랜드 파워를 앞세운 일본에 여전히 뒤져 있는 상황이다.

유망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디지털가전·광통신기기·이동통신기기·네트워크장비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당분간은 국내 전자업계가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쟁우위의 기반이 될 차세대 원천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99년을 기준으로 국내 전자산업계의 기술수출 규모는 1억2000만달러인 데 비해 기술수입이 무려 14억4000만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은 우리 기술의 현주소를 가늠케 한다. 미래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세대는 물론 차세대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일이 더 없이 중요하다. 그러한 기술을 확보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이기기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차세대 기술에 대한 준비를 서두르는 일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차차세대 원천기술의 확보를 통해서 현세대 원천기술을 가진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도 가능하고, 크로스라이선스 전략으로 로열티 부담을 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차세대 기술도 곧 차차세대 기술에게 따라잡히게 마련이다.

그러자면 국가 차원에서의 지원과 육성이 필수적이다. 특히 기업은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선별된 기술분야에 가능한 자원을 집중하는 연구개발전략이 필요하다.

아웃소싱과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한 적극적인 네트워킹은 부족한 원천기술력을 보완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경쟁관계에 있던 D램 반도체 분야의 NEC와 히타치가 전략적 제휴를 통해 합작법인을 세운 것도 연구개발에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비용을 분담하고 부족한 역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다.

또 세계 최고 수준의 생산기술력을 강점으로 활용하는 전략도 필요하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던 광스토리지 분야에서 원천기술이라는 강점을 가진 히타치와 뛰어난 생산기술력을 강점으로 하는 LG전자가 제휴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생산기술력을 잘 활용하면 선진기업의 원천기술뿐만 아니라 부족한 연구개발 역량까지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원천기술을 가지고 ‘기술주권’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그것 자체로 막강한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기술주권을 회복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해내야 할 절대적인 사안이다.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기술발전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간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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