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게임·영화·비디오 등 문화상품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만든다 해도 반드시 유통된다는 보장이 없다. 이른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위원장 김수용)’의 ‘등급 분류’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강국인 일본과 미국이 신고절차만 거치면 자유롭게 게임을 유통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프랑스, 영국 등과 유사하게 특별법, 즉 음반 비디오물 및 게임물에 관한 법률(이하 음비게법)·공연법·영화진흥법에 의거해 법정기구인 영등위가 등급분류 업무를 맡도록 하고 있다.
정부차원에서 게임을 심의하는 목적은 ‘불법 게임기의 여과, 국민정서의 보호, 그리고 국내 게임산업 발전 도모’다. 목적대로만 시행한다면 이만큼 훌륭한 제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많이 다르다. 심지어 등급분류 제도가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제도냐는 지적까지 나올 정도다.
영등위 등급심의는 특히 과거 ‘사행성을 조장하는 오락매체’로만 간주되던 게임이 이제는 규모면에서 영화산업을 제칠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해 고부가가치 산업의 간판스타로 부각하는 등 사정이 180도 달라지면서 전에 없는 도전을 맞고 있다.
현행 심의제도에 관한 논란은 혼란과 시행착오로 점철된 심의제도의 변천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지난 3년간 무려 세 차례나 심의 관리체계가 바뀌면서 심의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사전심의에 집중된 나머지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사후관리체계까지 무너졌다는 지적이다.
현재 시중 게임장에는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이하 한컴산·회장 은덕환)’가 검사한 게임기,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가 검사한 게임기, 그리고 현재의 영등위가 등급분류한 게임 등 3개의 서로 다른 기관이 상이한 기준을 적용해
검사 또는 심의한 게임이 뒤섞여 있다.
당초 게임제공업자들을 대변하는 한컴산에 의해 검사업무가 자율적으로 이뤄지다 지난 98년 9월 주무부처가 보건복지부에서 문화부로 이관되면서 공진협이 검사업무를 수행하던 것을 지난 99년 6월 다시 영등위가 등급분류라는 새로운 형태로 심의를 벌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합격, 불합격으로만 분류해 상대적으로 기준이 관대하던 과거와 달리 등급분류방식의 현행 심의제도하에서는 시대역행이라는 비난이 쏟아질 만큼 매우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의제도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영등위는 창작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공공성과 윤리성을 유지하고 유해 영상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게임업계는 영등위 심의가 급속히 변화하는 시장현실과 괴리된 채 운영돼 오히려 게임산업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경쟁국가에서 시행되지도 않는 불필요한 심의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시간과 자금의 낭비도 클 뿐만 아니라 수출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게임심의를 둘러싸고 끊이지 않는 수많은 논란은 ‘등급분류 기준의 현실성’ ‘다른 매체와의 형평성’, 그리고 궁극적으로 ‘심의제도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로 귀결된다.
현행 등급분류기준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게임은 이른바 ‘사행성 조장’ 게임으로 지나치게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심의대상으로 삼아 비판이 높다.
‘화투’ ‘포커게임’ ‘메달게임’ 등 엄연한 사행성 게임에 대해서는 베팅, 크레티드점수 등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등급을 부여하는 반면 같은 사행성 게임인 ‘릴식게임’ ‘띠식게임’ ‘짝맞추기식 게임’ 등에 대해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사용불가 판정을 내리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국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카지노업이 영업중인 마당에 유독 업소용게임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 점과 영화나 비디오 등 다른 매체와 달리 게임에 대해서만 ‘사용불가’ 판정을 내리록 한 것도 형평성을 잃은 기준이라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수입 게임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국산 게임의 불합격률에 대해서도 형평성 시비가 일고 있다. 실제로 지난 99년 수입 게임 불합격률은 7.7%였던 데 비해 국산 게임 불합격률은 37.5%에 달했다.
이와 관련, 전세계적으로 올해 최대 화제작 중 하나로 꼽힌 복합장르 게임 ‘블랙 앤 화이트’ 한글판이 심의 지연으로 이달 초 출시된 것도 게임업체를 당혹케 한 경우다. 지난 3월 말 전세계 동시출시 예정이었으나 유독 한국에서만 발매가 늦어져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개발의욕이 꺾인 게임업체들의 “굳이 개발에 나서느니 수입을 하는 게 오히려 속 편하다”는 자탄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이유 등으로 등급을 받지 못한 게임에는 ‘등급보류’나 ‘사용불가’ 결정이 내려지게 돼 개발업체는 이들을 일체 시중에 유통할 수 없다. 그간 투자된 시간과 개발비가 공중으로 날아가버리게 돼 개발사는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사행성 게임에 대한 심의기준을 완화하고 ‘등급외 등급’을 설치해 현재의 절름발이 심의제도를 하루 빨리 완전한 등급분류제도로 정착시키라는 요구가 쏟아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과 미국처럼 신고만 하면 유통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사행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한 사후관리를 통해 엄격히 규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단속 등 사후관리체계의 미비를 방치한 채 사전 등급심의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불법 사행성 게임이 판치는 현실에서 심의 불합격은 개발제품을 사장하는 것”이라며 “이는 곧 개발의욕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선의의 피해자만 양산해 게임산업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불법 게임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지 않은 채 정당한 절차를 밟는 업체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 불합격 판정을 남발한다면 게임산업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C방에만 가면 얼마든지 성인용 게임을 청소년이 즐길 수 있는 현실에서 집에서나 즐길 수 있는 청소년 이용가 게임은 청소년이 외면한 지 오래다.
이같은 지적에 대해 영등위의 한 관계자는 “법이 정한 대로 집행하고 있을 뿐”이라고 일축하고 “문제가 있으면 법을 바꾸면 될 게 아니냐”고 밝혀 영등위 심의가 ‘게임산업의 진흥 도모’와는 꽤 거리가 있음을 드러냈다. 영등위가 민간자율기구라고 하나 여전히 행정편의 논리로 움직이는 정부기관의 연장이라는 느낌을 짙게 풍기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현재 불법 게임기로 영업하는 게임장이 전국 1만여곳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현실에서 어차피 불법 게임기의 유통을 완벽히 차단하지 못할 바에는 심의기준을 현실에 맞게 과감히 완화하거나 아예 심의업무를 게임관련 단체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온라인게임과의 형평성도 큰 문제다. 영등위는 구체적인 형태를 띈 오락실용게임이나 PC게임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세세하고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반면 온라인게임에 대한 심의는 게임의 특성을 탓하며 제대로 된 등급분류 기준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등 거의 방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과다한 필증료와 심의료는 또 하나의 논란거리다. 영등위가 재정확보를 위해 게임개발사에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는 주장은 접어두더라도 업계에서는 제작원가가 200원도 안 되는 필증 1개를 5000원에 판매하는 것은 불황을 겪고 있는 업체에도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법적 근거도 희박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정범구 의원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영등위가 출범때인 지난 99년 6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거둬들인 필증료 판매 수입은 4억8000만원으로 전체 심의관련 수수료의 30%가 넘는다. 이처럼 법적 근거가 문제가 되자 부랴부랴 음비게법을 수정해 필증료 징수 근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영등위는 등급분류 결과는 게임뿐만 아니라 불합격한 게임의 목록도 업체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불합격될 가능성이 높은 제품을 사전에 파악해 ‘예측가능한’ 개발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게임업체 보호라는 좋은 취지로 시행됐지만 결국 음성적인 관행을 부추겨 게임업계를 망가뜨린 원흉으로 사라져버린 ‘특별소비세’와 같은 실패한 정책이 되풀이된다면 곤란하다. 일본, 미국에 이은 세계 3대 게임강국 실현을 꿈꾸는 국내 게임산업의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이제 규제 일변도의 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해 구호로서만 존재해왔던 산업진흥 도모를 고려해야 한다.
<최승철기자 rockit@etnews.co.kr>
표
<99년 오락실용게임물 심의 현황>
합격 사용불가(불합격) 계 불합격률(단위:%)
국내게임물 238 150 400 37.5
국외게임물 250 22 286 7.7
<재심의 불합격률 추이>
98년 99년
합격 불합격 계 불합격률 합격 불합격 계 불합격률
(단위:%) (단위:%)
영 화 5 6 11 54.6 4 6 10 60
비 디 오 7 7 14 50 4 3 7 43
P C 게 임 1 4 5 80 9 0 9 0
오락실용게임 3 9 12 75 4 45 49 82
<자료:영상물등급위원회>
많이 본 뉴스
-
1
챗GPT 검색 개방…구글과 한판 승부
-
2
SKT, 에이닷 수익화 시동...새해 통역콜 제값 받는다
-
3
올해 하이브리드차 판매 '사상 최대'…전기차는 2년째 역성장
-
4
에이치엔에스하이텍 “ACF 사업 호조, 내년 매출 1000억 넘긴다”
-
5
갤럭시S25 '빅스비' 더 똑똑해진다…LLM 적용
-
6
테슬라, 3만 달러 저가형 전기차 첫 출시
-
7
“팰리세이드 740만원 할인”…車 12월 판매 총력전 돌입
-
8
정부전용 AI 플랫폼 개발…새해 1분기 사업자 선정
-
9
곽동신 한미반도체 대표, 회장 승진…HBM 신장비 출시
-
10
AI 기본법 법사위 통과…단통법 폐지·TV 수신료 통합징수법도 가결
브랜드 뉴스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