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성 군산대 교수 yschoi@kunsan.ac.kr
필자가 사는 서해안의 도시 군산은 가끔씩 예기치 않은 일로 부산할 때가 있다. 북으로 곡물을 수송할 때가 그렇다. 대개 이런 결정은 느닷없이 이뤄진다. 우선 곡물저장창고에서 도정공장으로 볏가마니가 운송되고 며칠 밤을 새워 깨끗한 쌀로 정미가 되며, 이어 북으로 실려간다.
이를 보는 시민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군산항 주위에는 한국전쟁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월남한 실향민이 집단으로 거주한다. 그들은 한겨울의 매서운 북풍만 코끝을 스쳐도 세미한 후각을 곤두세워 고향의 냄새를 식별한다. 그렇게 한숨과 눈물과 그리움을 보듬고 살아왔다. 그러나 엔지니어적인 판단을 즐겨하는 나는 물량지원만으로는 실향민의 고민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본다.
근자에 남북 정보통신(IT)교류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분분하다. 아직 대부분이 담론 수준이며, 기획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접근에 대한 한계와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한 상호관계 때문에 장기적이며 구체적인 방안 도출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가지 기저를 염두에 두고 협의와 투자에 임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 중 한가지는 북한의 음성전화망 현대화가 대북 정보통신사업의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정보화의 차원에서 다뤄져야지 기업의 영리나 이산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 수준에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전화가 우리 생활의 필수품이 된 지는 오래다. 실시간성과 편리성, 그리고 장비와 프로토콜의 완벽한 표준화로 인하여 한 세기 전과 비교하여 삶의 패턴을 가장 근본적으로 바꾼 멋진 작품이 음성전화다. 전화로 인한 통신수단의 정상화야말로 지금의 북한에서 가장 필요한 사업이다.
99년 북한이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총 전화가입 회선수는 110만이며, 100명당 4.8회선을 사용하고 있다. 그나마 평양·청진·강계·함흥·혜산·신의주의 6개 도시가 전체의 65%를 차지한다. 그밖의 지역 전화사정은 얼마나 열악한지 가히 짐작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인구비례로 본 회선수가 남한의 10분의 1인데 반해 통신종사자는 무려 1만5000명으로 당시 남한의 약 4분의 1이나 된다는 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교환기가 인력소모가 많은 수동식 또는 기계식임을 반증한다. 북한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꼭 전화망 현대화가 유선기반일 필요는 없다. 셀룰러 방식까지를 포함하여 뭐든 투자비용과 효과를 고려하여 결정하면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적 측면보다는 소요경비일 것이다. 민간기업에서 부담하고 영업이익을 찾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지만 필자는 이 경비를 국가 차원의 통일비용에서 미리 지출할 수 있다고 본다. 통일비용의 정의는 다양하나 대체로 통일이 실현되었을 경우 분단으로 인한 이질적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체의 사회·경제적 기대비용이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71년 분단후 최초로 남북 직통전화가 개설되었고 다음해 7·4공동선언이 나왔다. 전화의 역할이 비단 남북의 정치적 교류뿐이랴. 인적·경제적 교류에 있어서도 초석이 되기 때문에 북한 전화 현대화를 위한 특별 지원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70년 서독 브란트 내각의 동방정책 추진 결과 통신교류에 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에는 서독이 통신비를 지불하고, 전화회선을 복구·증설하며, 교환방식을 수동에서 반자동으로 전환하는 등의 획기적인 대동독 전화지원책이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통일전인 87년에는 무려 3600만건의 전화가 서독에서 동독으로 걸려갔다. 이 비용은 고스란히 서독의 몫이었지만 통일이라는 역사적 선물은 이런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서 통일방식이나 통일비용 조달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장 효과가 분명하고 언젠가는 해야 할 북한의 전화시설 구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좀더 활발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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