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에게 있어서 황색은 두려운 색깔이다. 8세기전 황색인종인 칭기즈칸에 의해 철저히 짓밟힌 이후에 그러했다. 막연한 공포는 아직도 서구인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105년전 청일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공포를 한마디로 압축했다. 「황색인종은 화를 불러올 뿐이다.」 이른바 「황화론(黃禍論:yellow peril)」이다.
20세기 후반 미국은 잇따른 황화를 당했다.
70년대 일본, 80년대 한국, 90년대 중국 등 세 나라는 마치 릴레이 경주하듯 그렇게 미국 시장을 침범했다.
그러나 미국은 잇따른 황색인종의 침략을 겁내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과거 그들의 조상인 서구인들과 같은 공포를 경험하지 못했다.
또 3국은 아직 미국과 맞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더욱이 3국은 서로 치고 받는 경쟁국들이다.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앞선 일본은 이미 미국에 완패를 당했다.
90년대 초만 해도 일본은 정치와 군사는 몰라도 경제에선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경제강국이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10년 동안 환경이 급변했다. 일본은 거품 경제가 식으면서 침체의 길을 걸었으나 미국은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한때 일본에 내줬던 경제 패권을 확실히 되찾았다.
원인은 딱 하나였다. 미국은 「정보기술(IT)산업」을 가졌고 일본은 이게 없었다. 일본의 IT산업은 이웃나라인 한국으로부터 조롱을 받을 정도다.
이에 일본 정부와 재계는 「IT재팬」 구상을 바탕으로 새로운 IT강국으로 도약하려 한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보다는 중국을 두려워한다.
중국은 막강한 시장을 바탕으로 한중일 3국을 묶을 패권 국가가 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으나 동북아 지역은 이미 세계 전자산업의 핵이다.
한중일 3국의 전자산업 생산 규모는 세계 생산(1조1888억달러)의 27.6%에 이른다. 일본과 중국은 미국에 이은 세계 2, 3위의 전자산업 대국이며 한국은 독일에 이어 세계 5위다.
3국의 시장 규모도 세계 시장(1조1619억달러)의 20%를 웃돈다. 일본은 2위, 중국은 4위, 한국은 9위 규모다.
3국을 따로따로 떼놓으면 미국의 상대가 안되나 합쳐놓으면 미국을 압도한다.
3국의 전자산업은 가전, 컴퓨터, 정보통신기기, 전자부품 등에 집중됐으며 수출 위주다.
하지만 3국은 경쟁상대인 미국의 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지난해 말부터 미국 전자경기가 위축되자 3국의 전자산업도 침체된 것은 이를 반증한다.
세 나라는 상호 협력보다는 저마다 미국 등 서양 국가와 거래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선진국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 것이다.
90년대 말 아시아 통화위기가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줬다.
아시아 통화 위기가 닥치자 한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중국과 일본은 다행히 비켜갔으나 언제든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나라는 서로의 시장만으로도 견실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3국이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 왔다면 통화 위기는 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사실 3국의 교류 단절은 수천년의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산둥성을 비롯한 중국 일대에 백제촌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한반도는 일본에 대한 중국 문물의 중개지였다. 고대국가 시절 3국의 활발한 교류는 근대화 직전까지 이어져 왔다.
하지만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3국의 교류가 일시적으로 단절됐다.
한국과 중국의 쇄국정책과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으로 인한 고작 100여년 동안이다.
그런데 잠들었던 대국, 중국이 깨어나면서 고대국가 시절 3국의 교류를 다시 트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미국의 높은 벽을 실감한 일본도 힘을 기르기 위해 그동안 외면했던 한국과 중국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중국은 선진기술 도입을 위해 일본과 협력할 필요성이 증대됐다.
특히 세계 경제의 화두로 등장한 IT는 3국의 교류를 촉발시키는 매개체로 떠올랐다.
3국마다 경쟁력을 갖춘 IT분야가 달라 상호 협력의 무드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경쟁 분야가 같고 또 격차가 있을 때에 협력은 무의미하다. 기술 이전은 곧 부메랑으로 다가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나 3국 가운데 IT가 가장 우수하다. 한국은 반도체와 TFT LCD를 비롯한 일부 핵심 전자부품 분야에서 생산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은 풍부한 인력과 시장을 갖고 있다. 세계에 흩어진 화교 자본도 막강하다.
서로 경쟁력을 가진 분야가 다르고 방향도 일치해 3국은 협력할 필요성이 증대된 것이다.
이 때문에 3국간 협력은 최근 본격화하고 있다. 한일 양국은 지난해 9월 차세대 이동통신 등 첨단 분야에 대한 연구개발 교류를 위해 「한일 IT협력 이니셔티브」 계획을 수립 발표했다.
중국은 한국, 일본과 하이테크단지 조성 등을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한편 통신사업자와 인터넷, 가전업체를 중심으로 한일 기업과의 전략적 제휴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중일과 대만 홍콩 5개국을 연결하는 국제 해저 광케이블 공사도 예정됐다. 이 망은 앞으로 북한과 러시아, 동남아로 확대될 것이다.
3국이 협력하면 세계 IT패권을 쥔 미국과 맞설 수 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장애물이 너무 많다.
일본은 아직도 한국과 중국에 대한 핵심 기술 이전을 꺼린다. 이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또 3국은 선진 구미 업체에 비해 기술력과 표준화 능력이 뒤떨어진다. IT인력도 양적, 질적으로 부족하며 정책적인 협조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같은 한자문화권에 있으나 서로의 언어보다는 영어에 더욱 익숙하다. 3국의 어린 초등학생도 이웃나라의 사이트를 제쳐 두고 영문 사이트만 본다. 또 근대화 이후 3국의 갈등 관계로 깨진 신뢰 관계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3국의 협력은 이미 대세다. 디지털 융합으로 산업간 경계가 붕괴되면서 3국은 서로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선진업체들의 거센 동북아 진출도 3국을 뭉치게 한다.
일본에 대한 구미 기업의 투자가 90년대 말부터 부쩍 늘어나 98년 처음 100억달러를 넘었다. 중국은 높은 성장 잠재력으로 세계의 기라성같은 기업들이 대거 진출해 호시탐탐 시장을 노린다.
한국도 IMF 이후 개방 정책을 펴면서 반도체에 이어 전자부품·소재 분야에서 외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하다.
한 세기전의 서양 제국주의 망령이 동북아 지역의 하늘을 다시 떠다니고 있다.
3국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
협력의 원칙은 세워졌으나 각론은 아직 없다. 이를 위해 3국의 정책 당국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3국은 우선 디지털경제 시대에 맞는 인프라를 서둘러 구축하고 있다. 비교우위에 따른 단기적인 협력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3국 모두 「윈윈」할 수 있는 협력 방향도 찾고 있다.
동북아 3국이 과연 구미 전자업체들의 세계 시장 지배구조를 깰 수 있을 것인가. 3국 연대의 잠재력은 확인됐으나 가능성은 미지수다. 3국은 아직 협력보다는 경쟁에 치우쳐 있다.
구미 국가들은 폭발적인 3국 연합의 힘을 두려워하나 정작 3국 스스로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촌의 이목은 3국이 협력을 도모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장으로 넘어간 「IT삼국지」의 전개 과정과 결말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시리즈를 마치며
5개월동안 시리즈를 게재하면서 독자들로부터 받은 질문 가운데 가장 많았던 것은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실도 있고 창작도 있다.
특히 이 시리즈에 등장한 외국인의 생각은 대부분 창작이다. 알려진 그 사람의 성격과 상황을 감안하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일 뿐이다. 그렇지만 국내 인사를 비롯해 직접 만난 사람의 발언과 생각은 직접 들었거나 「사실」에 근접한 것이라고 밝혀둔다.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이 란을 빌려 사과한다.
이번 시리즈는 새로운 IT강국으로 떠오른 한중일 3국의 경쟁 구도와 앞으로 펼쳐질 협력을 보여 주기 위해 시도된 것이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소설 형식을 빌렸다.
협력보다는 경쟁 부분에 치우쳤는 데 아직은 3국이 치열하게 다투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상호 협력의 움직임이 우리 지면에 많이 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 일본에서 또 다시 교과서 파동이 일었다. 모처럼 조성된 3국 협력 무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잊을만 하면 이웃나라를 자극하는 일본 위정자들에 대해 분노보다 안타까움이 인다. 일본이 동북아지역에 부는 풍향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다.
이같은 돌발 변수에도 불구, 3국의 경제 협력 특히 IT협력은 앞으로 더욱 확산될 것이다. IT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세 나라의 경제가 협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이러한 사실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 5개월 동안 에둘러 왔을 뿐이다. 부족한 게 많았음에도 그동안 격려와 질책을 아끼지 않은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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