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은 살아있다>(2)생산 패러다임의 변화

◆제조업의 생산양식 패러다임도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국내 제조업은 세계 제조업의 메카인 일본과 가까이 한 「원죄」 탓에 일본에서 흘러넘치는 저가형 제품주문의 단순조립, 가공을 통해 개발역량을 구축하고 모방에서 혁신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대량생산기반의 발전과정을 밟아왔다.

구조적으로 대량생산 패러다임에 익숙했던 한국 제조업은 외환위기 이후 힘겨운 체질개선작업에 들어가 전례없는 변화상을 경험하고 있다.◆

이전에 한국 제조업의 생산양식을 지배해온 대량생산체제는 더 이상 급변하는 디지털 경쟁환경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제조업 전문가군의 일치된 견해다.

그리고 한국은 제조업분야의 기술경쟁력에서 일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어중간한 위치며 가격경쟁력에서 세계시장에 넘치는 중국산 제품을 맞아 점점 경쟁하기도 버거운 상황에 몰리고 있다.

국내에서 한 사람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면 중국에서 20명의 인력을 쓸 수 있는데 뭐하러 골치 아프게 국내에서 제조업을 하냐는 시각이 요즘 제조업 관계자들의 심정이다. 대기업 위주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조선, 철강분야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나머지 제조업 분야에서 국내 산업공동화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변화에 대응해 제품의 개발에서 생산, 조립 등 주요 제조업 공정의 아웃소싱이 날로 전문화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기업 하청물량에만 의존해 공장을 운영하던 조립업체 중에서도 이른바 굴뚝 벤처기업의 생산물량을 겨냥한 다품종 소량생산식 시스템을 도입해 변신을 꾀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지난해 9월 구로공단에 생긴 뉴인포시스텍(대표 정효동)은 정밀계측장비를 포함한 PCB어셈블리 2개 라인과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셀라인, 풀어셈블리라인을 갖추고 주로 벤처업체의 신기술상품 조립생산을 대행한다.

일정수준 이상의 생산물량을 확보해야 공장을 가동하는 여타 전자부품 외주업체와 달리 뉴인포시스텍은 1000개 미만의 생산주문에도 유연하게 대응하는 주문형 어셈블리 시스템을 도입해 약 20종의 전자부품 조립을 하고 있다.

이 회사가 취급하는 제품은 마우스, 키보드, 무전기, 전자모듈 등으로 다양한데 생산물량은 대부분 건당 5000∼10000대 수준이다.

최근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아파트형공장에 입주한 소규모 제조기업들은 대부분 자체 생산시설만으로 충분한 생산능력을 확보하기 힘들고 제조업 관련 굴뚝 벤처기업들은 실질적으로 개발, 설계능력만 있지 생산능력은 매우 취약한 상황이다.

이미 대규모 생산라인은 중국으로 이전한 지 오래고 아주 급한 생산물량이 아니면 외국기업은 좀처럼 국내 조립업체에 주문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외국의 긴급주문이나 벤처기업의 소규모 생산주문에는 기존 대규모 어셈블리 라인으로 기민하게 대처하기가 힘들다. 이 때문에 라인전환이 신속하고 기술역량도 갖춘 중견 조립업체의 입지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다섯명 이하의 노동자가 제품생산의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셀방식에 대한 관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때 다품종 소량생산에 적합한 신규 생산양식으로 관심을 모았던 셀방식은 국내 대기업 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났지만 한국형 스타일으로 거듭나 중소제조업체 생산라인에서 부활하고 있다.

특히 실험기기, 계측기기 등 소비자 위주의 소량주문이 대부분인 제조업분야에서는 굳이 일관식 컨베이어 라인이 필요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조립분야 외에도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인 개발, 설계분야에도 아웃소싱 바람이 거세다. 대기업의 구조조정 여파로 우수 설계인력들이 대거 외부로 쏟아져 나오면서 우수인력난에 시달리던 중소제조업체를 대상으로 개발서비스를 대행해주는 기업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이른바 소그룹 엔지니어링 회사로 불리는 이들 개발대행업체는 PCB설계에서 제품디자인,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금형에서 최종적인 생산기술까지 지도하고 있다

지난 10월에 신설된 MIT(대표 임성흔)는 대우전자 출신의 전문기술자 4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엔지니어링 전문업체다.

수도권을 통틀어 기구설계나 회로쪽의 엔지니어링 기업은 최근 2년 사이 100여개로 급증했다. 대기업에서 풍부한 개발경험을 갖춘 이들 전문기술인력은 예전에 몸담던 대기업에서 개발오더를 받는 경우도 있다.

다소 비싼 의뢰비용에도 불구하고 이들 엔지니어링 업체는 굴뚝벤처와 중소제조업체에 새로운 경쟁력을 부여하고 있다.

갈수록 제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짧아지는 시장환경에서 얼마나 빨리 신제품을 내놓을 수 있느냐가 회사 생존을 좌우하는데 모든 개발작업을 반드시 자체 기술진으로 해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설계는 국내에서 하고 대량제조는 임금이 저렴한 외국에서 대행하며 판매영업은 대기업 계열사에 맡기는 식의 분업화가 하나의 제조업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이같은 흐름 뒤에는 그동안 한국경제를 주도해온 대량생산체제가 장기적으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에 기초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내 제조업체의 주업무가 제품개발과 초기 시장반응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생산이 주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처럼 유동적인 생산환경은 정규직 근로자 대신 아르바이트 시간제 근로자들의 비율을 높여 노동시장에 긴장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혹은 아예 소사업부제로 조직을 나눠 분사하기도 한다.

제조업의 핵심역량만 놔두고 나머지 부수적인 생산공정은 아웃소싱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이에 따라 어제까지 같은 회사 직원으로 있다가 밥그릇을 따로 챙겨 독립경영제로 바뀌는 케이스가 주요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일반화되는 분위기다.

대우전자 구미공장 내에 위치한 금형생산부는 지난해 5월 몰텍(대표 박종화)이라는 독립법인으로 분사했다.

분사 10개월째를 맞아 이 회사는 초기 우려와 달리 종업원수도 50% 늘어났고 매출신장도 전년대비 30%로 순조로워 성공적인 분사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예전에는 대우전자에 들어가는 금형개발만 담당하던 이 조직은 분사이후 해외기업을 대상으로 수출작업을 행하는 등 생산경쟁력이 높아졌다고 자평한다.

혹자는 우리나라 제조업의 「나누기 유행」을 가리켜 대만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소기업 위주의 대만 제조업이 최근 대기업화로 진행되면서 경제가 침체되고 있는데 이제 반대로 한국은 대기업이 쪼개지면서 중소벤처형 제조업이 다시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국내 제조업계의 생산과정에서 인력뿐만 로봇노동력의 부상에도 대비해야 할 시점이 오고 있다.

그동안 산업용로봇은 자동차 생산라인 같은 대형 작업장에서나 일부 사용됐으나 최근 IT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공지능과 제어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한 자리에서 용접, 조립이나 하던 로봇이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원가하락으로 인간노동력 대비 생산성면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보다 광범위한 산업현장에 투입될 로봇노동력은 기존 노동시장에 긴장요인이 되지만 경쟁력 강화의 핵심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아직까지는 융통성 있는 인간노동력의 우위가 절대적이지만 이미 제조업의 많은 분야에 투입가능한 차세대 산업용로봇이 속속 개발돼 3∼4년 안에 실용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로봇노동력의 대두는 IT기술혁명과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21세기 한국 제조업계에 새로운 흐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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