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반도체와 TFT LCD, 철강, 조선 등 경쟁력을 지닌 일부 제조업종의 경기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있다. 국내 고용효과와 부의 창출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도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 요소를 분석해 보면 대규모 장치산업에 기반한 생산공정기술에서 비교적 강한 면모를 보인다. 교육수준이 높고 숙련된 노동인력이 풍부하며 정부보호 아래 육성된 대그룹군이 경쟁적으로 중후장대형산업에 집중 투자한다. 이러한 대기업 주도 규모의 경제정책은 장치산업에서 특정분야에 집중 투자를 통해 새로운 설비 생산성의 효율성을 높인다.
한국 제조업은 후발주자의 유리한 장점을 십분 살려 위험부담없이 대규모 투자로 수익이 보장되는 사업에서 성공을 거둬왔다. 즉 세계적으로 동일한 요구를 지닌 표준제품이나 단품형태일 때 놀라운 경쟁력을 보여왔다.
미래 기술예측이 비교적 손쉬운 분야인 반도체, TFT LCD, 철강 등이 대표적 성공사례다.
상대방의 다음 수가 뻔히 보이는 포커판에서 한국 제조업은 강자였다.
또 신제품에 대한 높은 수용력도 이러한 분야의 제조업 경쟁력에 더할나위없는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높은 소득성장률과 성급한 국민성, 과시적인 성향은 역설적으로 세계 어느나라보다도 새로운 신기술 제품 도입에 과감하게 만들었다.
이는 소득수준에 비해 초기 규모의 경제를 급성장시켰고 우리와 엇비슷한 다른 나라에선 엄두도 못내는 첨단 생산설비 투자에 경쟁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신기술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국민적 성향도 우리가 간과해온 한국경제의 핵심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밖에 리버스엔지니어링을 통한 조립기술 확보, 장치산업의 경우 턴키베이스기술 도입으로 생산공정상의 경쟁능력을 확보하면서 빠른 속도로 선진국 언저리에 올라섰다. 문제는 이러한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21세기에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래 경제환경에서 제조업체가 세계일류로 살아남으려면 표준주도력·네트워킹력·마케팅력·연구개발력이 중요한데, 현재 한국 제조업은 이러한 요소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다.
제품개발에서의 차별화된 고가제품보다 저가의 양산범용제품에 치중한 결과 세계시장을 석권할 원천기술과 해외마케팅능력이 부족하고 기초연구와 마케팅능력은 특히 취약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협요인은 바로 이웃한 중국이 이미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전세계 백색가전제품의 35%가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세계 일류 제조업체들이 앞다퉈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인건비가 국내의 10% 수준에 불과한 중국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상품 앞에서 국내 제조업체의 전반적인 경쟁력은 날로 위축되고 있다.
그나마 21세기 한국 제조업의 희망을 걸 만한 변수는 북한이다. 아직 불확실한 요소가 많지만 북한의 합작공단이 가동되고 저렴한 노동력에 보다 쉽게 접근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면 2000년대 말까지 90년대 수준의 산업경쟁력 유지가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내수시장의 확장개념으로서 북한은 구매력이 약해 국내 제조업체에 큰 수익은 가져다 주지 못할 전망이다.
21세기에도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야 한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금과 기술력을 갖춘 대기업은 물론이고 고만고만한 규모의 중소업체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 지식경영 등은 공허한 구호로만 들리기 십상이다.
주된 이유는 그동안 한국경제의 고비용을 극복하고 기업경쟁력을 끌어올릴 마술방망이로 생각되던 IT기술이 아직까지 별다른 생산성 증대효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간 전자상거래(B2B EC) 시장은 아직 지지부진하고 물류·유통 분야와 IT기술의 접목효과도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제조업체간 기술거래가 활발해 경쟁력 우위에 있는 생산요소들간의 이합집산이 원활히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제조업의 경쟁력 강화에 필요한 지식인프라는 아직 효용가치가 검증되지 못한 형편이다.
제조업이 붕괴되면 유통이나 서비스 산업은 다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기대감으로 인터넷이 국가경제의 중심처럼 부각되고 있지만 제조업의 뒷받침없는 국가경제는 사상누각이다.
경쟁력을 상실해 문을 닫는 제조업체가 늘어날수록 정부가 해결해야 할 짐은 커지게 된다.
과거 저임금 중심의 1단계 성장과 설비투자에 의한 2단계 제조업 성장에 성공했지만 이제는 IT기술과 접목한 제조업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최근들어 제조업과 서비스·콘텐츠가 결합된 퓨전식 산업아이템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스스로 제조업체라는 상상력의 한계에 가두지 말고 자신의 경쟁우위에 근거, 수익창출을 위해 유연한 발상의 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IT혁명은 제조업과 관계없이 진행되다가 수익성의 한계를 깨닫고 이제는 제조업과 연관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에 한참 뒤떨어진 국내 제조업을 내팽개치고 사양산업으로 간주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제조업계도 이제는 단순한 생산요소 투입의 양적확대가 아닌 새로운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노력을 높여야 할 때다.
정부의 제조업정책은 전자상거래 등 정보통신혁명의 성과를 산업현장에 흡수하면서 제조업의 기술혁신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야만 한국 제조업의 미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터넷혁명은 국내 제조업계의 시장전망을 혼란스럽게 할 뿐 국가전반의 생산성 향상 효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보다 많은 IT벤처기업들이 제조업계의 효율성 향상을 위해 도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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