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더 뉴스>문광승 하나비즈 대표이사

「시민운동가에서 남북 정보기술(IT) 협력사업가로.」

작고 다부진 체구에 수수한 용모를 가진 하나비즈(http://www.hanabiz.com) 문광승 사장(40) 사장에 대한 이력이다.

그는 요즘 국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고 있다. 다름아닌 남북 IT 교류·협력을 위한 이정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7일 남한의 IT업계·학계·언론계 관계자들로 구성된 「남북 IT 교류 민간대표단」을 이끌고 방북해 남북 IT 교류 사상 최초로 평양정보쎈터(PIC)와 「남북한 IT합작회사」 설립 계약 등 8개항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11일 금의환향했다.

『이번 합의는 남북경협 사상 북한의 첫 IT 승인사업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북측에서 IT협력사업을 벌일 남측 기업들을 언제든지 받아들이고 우대하겠다는 것을 계약서에 명기한 것은 이번 방북에서 가장 큰 성과지요. 또 남한의 IT를 도입하겠다는 북측 내부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문 사장은 단 한 차례의 방북으로 계약을 맺고 합의를 이루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방북이 당초 기대한 목표를 150% 초과달성했다고 매우 흡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협상 과정에서도 북측은 남한 기업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남측 IT기업들과 보다 폭넓게 협력해 나가려는 북측의 의지가 강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상외였지요.』

하지만 그는 방북 전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설레임보다는 북측과 합의를 무난히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과 책무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협상 전날에는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협상 당일 그는 새벽 4시께 서류를 챙기면서 따로 담배 3갑과 세면도구를 넣었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협상장소인 PIC회의실에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배수진이었지요.』

협상장에 도착해서도 그는 PIC 측에 『오늘 중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여기서 날을 새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PIC 측이 몇 가지 문구 수정을 요구하는 선에서 남측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인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사전 준비가 철저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PIC와 계약하기 전보다 더 걱정이 앞섭니다. 이제 공이 남쪽으로 넘어왔다는 생각에 요즘은 정말로 잠이 안 옵니다.』

앞으로 남한의 수많은 기업·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해 PIC와의 계약을 유종의 미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다.

특히 3월 중에는 통일부에서 남북IT협력사업 승인을 받는 대로 곧바로 기업 방북단을 구성해 북한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협력사업에 대해 의지가 분명한 기업들을 선별해 앞으로 매달 한 차례씩 방북할 계획입니다. 방북 전에 기업들이 어떤 부문에서 협력할 것인가를 철저히 검토하고 이를 북측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한 뒤 방북과 함께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1년의 절반은 평양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문 사장은 이번 일로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적인 대변신을 일궈냈다. 시민운동가에서 남북IT협력 벤처사업가로의 극적인 탈바꿈이 그것이다.

광주 금호고 2학년 때까지 전교에서 3등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던 그는 3학년이던 80년, 광주 민주화항쟁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면서 학생운동에 헌신키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81년 경희대 무역학과에 입학하자 죽을 각오로 줄곧 시위에 참가했다.

대학 3학년 때 시위주도 혐의로 강제징집당한 그는 제대 후 인천의 중소기업에 위장 취업해 노동운동도 하고 해고 뒤에는 한동안 막노동도 경험했다. 그러다 96년 경실련에 합류, 조직부국장·경제정의연구소 사무국장직을 맡아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경실련에서 국가예산 감시운동을 벌일 당시 교수 등 전문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3개월이 지날 때쯤 교수들이 『당신이 우리보다 훨씬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을 잘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시민운동에 정열을 쏟았다.

99년 그는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창립 멤버로 참가해 인터넷 시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그는 청바지 제조업체인 닉스사의 인터넷 도메인 가짜공모 사건을 낱낱이 파헤쳐 결국 닉스사의 사죄를 받아내 유명인사가 됐다. 당시 그가 얻은 별명이 「아이디어 뱅크」.

『뭐든 한 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입니다. 일단 목표를 분명히 세우면 전문가들에게 묻고, 배우고, 도움을 받아서 꼭 이뤄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딱 부러지고 야무진 성격을 다진 그가 남북한 IT협력사업에 눈을 뜨게 된 때는

지난 99년 11월.

『남북이 이른 시일 안에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IT산업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그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금강산국제그룹 등과 공동으로 지난해 4월 남과 북이 하나(HANA)가 되는 비즈니스(BIZ)를 한다는 뜻을 가진 벤처기업 「하나비즈」를 세웠다.

그리고 북측 인사들과 안면을 터온 지 몇 개월 만에 그는 대규모 청사진을 내놨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자동차로 10분이면 닿는 중국의 단둥과 신의주를 묶어 국제적인 소프트웨어·멀티미디어 전문개발단지인 「단둥-신의주 소프트웨어 멀티미디어(SM)밸리」를 조성하자는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

이번에 합의한 「남북 IT합작회사」 설립으로 단둥-신의주 SM밸리의 조성은 급물살을 타게 됐다.

『앞으로 단둥과 신의주는 400여명의 북한 IT 인력과 300여개가 넘는 남측 IT기업, 50여개 이상의 세계 각국 IT기업이 입주한 동북아시아 최대 IT 집적단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밸리를 남북이 손을 맞잡고 중국과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IT산업 전진기지로 키워나갈 것입니다.』

문 사장은 자신이 착안한 단둥-신의주 SM밸리의 성공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밸리가 남북한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윈윈」 모델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제 공은 남측에 넘어왔습니다. 남측 사람들이 그동안 너무 앞뒤를 재거나 돈을 벌려고 집착한 데서 벗어나 남북 IT협력에 적극 임해야 할 때입니다.』

80∼90년대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에 정열을 쏟은 그는 이제 남북 IT교류와 협력을 향한 「희망의 홀씨」로 새로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온기홍기자 khohn@etnews.co.kr>



<약력>

△1962년 10월 전남 장흥 출신 △1981년 경희대 무역학과 입학 △1985∼87년 인천에서 노동운동, 해고 △1988년∼91년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 활동 △1996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조직부국장) 시민운동 시작 △1997∼98년 경제정의연구소 사무국장, 예산감시위원회, 정부회계 복식부기도입추진위원회 활동 △1999년 「함께하는 시민행동」 발기인 참여, 운영위원(현) △2000년 1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업국장 △2000년 4월 하나비즈 설립 및 대표이사(현) △2000년 7월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창업지원정책연구반, 인력양성정책연구반 연구위원 △2000년 8월 통일IT포럼 발기인 △2000년 11월 한국소프트웨어진흥원 남북소프트웨어협력자문회의 자문위원(현) △가족관계:부인 박금숙(38), 딸 문달해(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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