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지 아시아 IT 대로망>21회-새로운 협력시대의 개막

지난해 11월 24일 싱가포르의 샹그릴라호텔. 이른 새벽부터 경비가 삼엄했다.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과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가 아침 일찍 조찬을 겸한 회담을 갖기로 했기 때문이다.

회담에서 세 나라 정상은 3국의 경제협력 증진에 협력키로 합의했다.

국책연구기관간 공동연구를 올 1월부터 본격 시작하고 정보기술(IT) 협력체제 구축을 위해 공무원 국장급 전문가 그룹을 구성키로 했다. 또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후 무역 및 투자확대 방안을 강구키로 했으며, 관련 연구 결과를 정책에 적극 반영키로 했다. 아울러 3국의 문화 및 인적 교류를 더욱 확대키로 했다.

3국 정상회담은 「베세토(BESETO:베이징·서울·도쿄의 이니셜) 밸리」의 출범을 공식선언한 자리였다. 세계 경제의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동북아 지역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밑그림은 이미 1년 전에 나왔다. 꼭 1년 전인 99년 11월 말 마닐라 코코넛궁이다.

3국 정상이 사상 처음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1년 뒤, 다만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가 모리 총리로 바뀐다.

세 나라는 갈등과 대립의 근현대사로 인해 가까이 있으면서도 데면데면한 사이다. 그 골이 너무 깊은지 이데올로기가 퇴색된 지 10년이 넘도록 3국만의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모였다. 누가 아이디어를 냈는지 알면 그 이유는 나온다. 오부치 총리다.

과거 일본 경제인들은 미국, 유럽과 같은 울타리에 있다고 믿었다. 스스로를 아시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맹렬히 추격하는 한국·중국과 협력해 봤자 손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다가 아시아 통화위기가 닥쳤다.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직격탄을 맞은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 위기를 비껴 갔으나 아시아 경제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됐다.

아시아 통화 위기 이후 2차 대전후 줄곧 의존해온 구미시장을 잃게 된다는 우려도 증폭됐다. 유럽연합(EU)이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통합해 새로운 무역 장벽을 쌓은 것이다.

일본 산업의 경쟁력도 빛을 잃기 시작했다. 주력 산업인 전자산업에서 일본은 이미 주도권을 한국과 중국에 내주고 있다.

일본 정부와 재계는 「이대로 가다가는 21세기 상반기안으로 몰락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초조해졌다.

『아직 힘이 있을 때 한국과 중국을 끌어들이자』 오부치 정부는 이렇게 판단했다. 초강대국 미국과 잠재 패권국인 중국과의 사이에서 「캐스팅보트」를 계속 유지해 보자는 전략이다.

특히 지난 97년 중국에 홍콩이 반환된 이후 중국의 약속대로 1국2체제가 별 지장없이 정착되자 중국과의 제휴에 대한 일본 정부와 재계의 믿음은 확고해졌다.

한국과 중국 역시 일본과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한국은 IMF통화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제 대국 일본의 자본을 필요로 했다.

중국은 일본과의 협력이 더욱 절실했다. 일류 국가로 성장하려면 일본의 자본은 물론 첨단 기술을 이전받아야 한국과 일본을 제칠 수 있다.

3국 정상이 모인 싱가포르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은 적절한 비유였다. 『오부치 총리는 아이디어상, 주룽지 총리에게는 제작상을 줘야합니다.』 늘 그렇듯이 정부가 나설 때는 이미 일이 생긴 다음이다.

일본의 경단련은 몇 차례에 걸쳐 한국의 전경련과 중국의 대외경제단체연합회와 민간 차원의 협력을 확대해 왔다.

기업들은 더욱 빨랐다. 도시바, NEC, 소니 등 일본의 주요 전자업체들은 이미 한국, 중국의 전자업체와의 제휴, 현지 투자를 강화했다. 올들어 3국간 협력은 반도체와 통신같은 첨단 산업으로 넓혀지고 있다.

특히 분단국가인 한국과 중국은 각각 북한과 대만과의 경제 협력을 확대하기 시작해 3국의 경제 협력은 앞으로 동북아 전지역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동북아 경제 협력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EU와 같은 경제블록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아시아지역에 대해 여전히 주도권을 행사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미국이 이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역시 자국을 위협할 유일한 나라인 중국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은 지난 90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주창한 동아시아경제권 구상을 실력으로 저지한 바 있다. 일본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러한 미국을 외면하면서 동북아 3국이 독자적인 액션을 취한다. 어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미국도 큰 물줄기를 막을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최대 시장과 낮은 인건비를 가진 중국에 대한 미국 기업의 투자가 이미 불붙었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통신같은 첨단 산업의 중국 진출을 앞장서는 것은 한국도 일본 기업도 아닌 인텔, 모토로라와 같은 미국기업들이다.

이들 미국 회사는 특히 공산권에 대한 첨단 기술의 이전을 금지한 코콤의 규제도 앞장서 깨뜨리고 있다.

일본 역시 새로운 강자인 중국과 손을 잡기 위해 미국의 우산에서 점차 벗어나려 한다.

그러면 동북아 경제권을 어느 나라가 주도할 것인가. 현재로선 자본과 기술이 우세한 일본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에 씻지 못할 빚을 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분단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며 특히 중국과는 청일전쟁 이후 100년 넘게 지속된 원수지간이다.

아무래도 중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일본은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과의 협력에서 얻을 것보다는 잃을 게 많다.

과거 역사에 대한 일절의 사과도 없는 것은 동북아 경제권에 대한 일본의 행보에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은 동북아 경제권이 일본과 중국 위주로 흘러갈 가능성을 염려한다. 자칫 들러리만 설 수도 있다.

전초병인 국내 전자업체들의 움직임도 아직은 이렇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투자는 활발했으나 「인건비나 따먹는」 수준이었다. 일본기업과의 제휴도 90년대 이후 중단되다시피 했다.

이러한 태도가 최근 1∼2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 통신과 디지털가전 분야를 필두로 한국의 전자·통신업체들은 중국과의 첨단 기술 교류 및 마케팅 협력에 나섰다. 필요하면 기술도 기꺼이 주겠다는 태도다.

일본 기업과의 협력도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삼성SDI는 일본의 NEC와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협력했으며 LG전자는 마쓰시타와 에어컨 분야에서 글로벌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

일본 업체와의 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중국 업체가 더욱 커지기 전에 우위를 유지해 중국 주도의 세계 시장 경쟁에서 일정 지분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기업의 속뜻을 중국과 일본 기업들도 잘 안다. 그렇지만 요충지에 자리한 한국의 중재 역할을 무시하지 못한다.

3국의 협력 무드가 완전히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우선 한국과 일본의 상호 견제가 여전하다.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통신 등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대만과 중국 등지로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또 한국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일본과의 협력을 최소화하는 대신 중국과 제휴하려 한다. 좋은 것은 중국뿐이다.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관계를 비집고 들어가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 세나라 모두 「동상이몽」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3국은 같은 배에 타려 한다. 싫어도 탈 수밖에 없도록 세계 경제의 흐름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3국의 협력은 미국과 같은 제3자가 개입하려 하면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주룽지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3국은 문화와 전통을 공유하는 국가들이고 경제도 밀접하다. 한국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일본경제도 그렇다. 한일 양국의 경제발전은 중국은 물론 아시아 경제에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예정된 초 경제대국이나 아직은 기량을 연마중인 중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한국과 일본이 무시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중국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한국과 일본으로선 오히려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다.

3국 협력 무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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