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던 지난 2000년은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부터 벤처기업의 붕괴현상까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제2의 IMF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국내경기가 경직된 요즘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국가경쟁력을 되살리려는 바람이 과학기술계내에 연초부터 불고 있다. 21세기 과학기술과 문화시대를 맞는 서정욱 과학기술부 장관(65)의 각오는 그래서 그 어느해보다 새롭다. 서 장관은 21세기 먼 앞을 보고 올해부터 정보기술·생명공학·나노기술·우주기술 등 국가 미래를 책임질 핵심첨단기술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20세기에 우리가 연구개발을 위한 댐을 쌓고 담수하는데 주력해 왔다면 21세기부터는 댐에 얼마나 좋은 물을 담느냐의 문제』라며 『머지 않아 그동안의 과학기술투자에 대한 질좋은 과일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 장관은 또 『지난해에 과학기술기본법, 과학기술훈장 제정, 대덕연구단지의 탈바꿈 등 국가과학발전 기반이 마련된 만큼 실사구시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을 선도하는 소명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21세기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새지평을 열어갈 서정욱 장관을 윤원창 부국장이 정부과천청사 장관실에서 만났다. 편집자
-올 시무식에서 베토벤의 환희를 직원들에게 틀어줘 관가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의미라도 있습니까.
▲21세기의 첫해인 올해를 투지와 열정을 바쳐 국가발전에 이바지하자는 의미에서 대학 때부터 애청해온 곡들을 직접 녹음한 것입니다. 베토벤의 곡처럼 환희에 찬 한해가 되길 바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지난해는 국가 과학기술의 운명을 좌우할 과학기술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과학기술계로서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해였습니다. 지난해를 되돌아 보면 어떻습니까.
▲지난 한 해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전환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바로 「신구(新舊)」가 균형을 잡아가는 시점이었지요. 과학기술계의 염원인 과학기술훈장 제도를 신설하고 과학기술정책의 기본틀을 정립하는 과학기술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옛 것과 새 것이 교차하는 한 해였습니다. 그중에 제가 자리하고 있었다는게 개인적으로 큰 영광입니다. 지난해를 도약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서는 올 한 해 발로 뛰며 과학기술 발전에 매진하는 것이 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연구개발 예산이 정부예산의 4.3%에 이르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세간에 좀 제대로 쓰자는 말이 있습니다.
▲기업과 대학이 연구개발의 주축이 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기업과 대학의 연구개발 투자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연구개발 투자의 약 80%가 민간투자에 이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는 원론적으로는 기초과학이나 원천기술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연구개발 투자 부담이 30%에 이르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너지 문제, 환경 문제와 같이 정부가 지원하지 않으면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시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민간이 해낼 수 없는 부분에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납세자인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연구개발 투자에 비해 성과가 없는게 아니냐는 시각이 많습니다.
▲과학기술 투자는 수력발전과도 같습니다. 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댐을 쌓습니다. 댐이 만들어진 후에 전기를 만들어 낼 만큼 물이 차 있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댐이라해도 그 기능을 다할 수 없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려야지요. 우리 과학기술계는 지금 바로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투자에 비해 성과가 없느냐고 타박을 하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만큼 빠르게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나라는 없다고 봅니다. CDMA, TDX 등의 개발로 그 어느나라보다 통신수단이 널리 보급돼 있지 않습니까. 과학기술의 생성물을 받아들이는 속도로 볼 때 성과가 나타날 시기는 오래지않아 올 것입니다.
-21세기 키워드는 생명공학(BT)과 정보통신(I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첨단 과학기술투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생명공학(BT)과 우주기술(ST) 산업은 시장성으로 볼 때 아직까지는 기초과학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IT산업은 초기 정부주도로 연구개발이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정부가 손을 놓아도 민간이 알아서 합니다. 생명공학이나 우주기술 역시 정부지원을 통해 자립이 가능하게 되면 BT산업과 ST산업의 중심은 당연히 민간부문으로 옮겨야 합니다. ST의 경우는 강대국의 헤게모니 싸움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실제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들어 나온 자동차 위치측정 시스템이니 기상관측 문제, 환경관측 문제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바로 ST입니다.
-이젠 연구개발에 있어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지난 30년 동안의 우리나라 연구개발과정을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모든 과학기술자들이 연구의 질보다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데 주력했습니다. 마라톤으로 보면 완주했다는데 의미를 뒀지요. 그러나 요즘 마라톤을 보는 국민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완주보다는 금·은·동 메달을 땄느냐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완주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듯이 연구개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록을 다투는 프로경기가 아닌 아마추어 마라톤 경주를 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제는 기록을 따져야 할 때지요. 따라서 국가과학기술정책도 「조림(造林)」이 아니라 「육림(育林)」으로 육성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난 30년간의 노력으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라는 나무를 배출해 국토가 푸르게 되었지만 노벨상을 탈만한 쓸만한 재목이 없었던 것이 사실아닙니까. 이제는 생산성없는 나무는 베어내고 재목이 될만한 나무를 키워 나갈 것입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큰 틀에서 시한을 주고 반드시 성과를 따질 것입니다.
-지난 2년여 동안 출연연의 경영혁신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70년대 출연연구소 사업은 우리나라 연구개발의 주축이 됐고 80년대 들어 출연연은 대학과 기업에 핵심 연구인력을 공급하는 인력풀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과 기업이 기존의 출연연이 해왔던 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또 기초과학 연구 성과로도 대학과 기업이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1차적으로 국가가 출연연을 만든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봅니다. 앞으로 출연연은 자활 자생의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앞으로 정부주도에서 벗어나 출연연이 스스로의 자생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씀이신데, 출연연이 그런 자생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출연연은 공공부문과 결합하거나 민간과 결합하는 길 중에서 자생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 연구인력을 흡수하는 차원에서라도 방향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1세기는 국제협력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제협력 방향은 어떤 것입니까.
▲말씀하신 것처럼 21세기는 조화와 협력의 시대입니다. 이제 나라와 나라는 대립된 관계가 아닌 협력, 협동하는 관계를 가져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한·중·일 극동 3국의 과학기술 협력을 통해 과학기술 선진국에 진입해야 합니다. 지난 아셈 서울회의에서 과학기술 국제협력 방안이 모색된 것은 우리나라가 국제 과학기술 교류의 첫발을 디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과학기술이 비정치적이어서 남북한 교류협력사업이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사업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장애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피가 섞이지 않은 외국과도 손을 잡는 시점에서 분명한 동질성을 지닌 민족간 교류는 당연한 것입니다. 최근들어 북한의 우수한 연구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을 보더라도 우수한 과학자 집단과 환경, 기술을 공유하는 과학기술협력은 빨리 이루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의 서로 다른 표준문제를 해결하는 등 내부적으로 범정부차원에서 부처간 정책조율을 거쳐 협력방안을 올해부터 본격 추진할 것입니다.
-올해 역점을 두고 추진할 정책은 무엇입니까.
▲과학기술기본법을 토대로 국과위 운영을 활성화해 「2025 과학기술장기계획」을 차질없이 추진할 방침입니다. 국가지정 연구실 사업을 주축으로 산·학·연 연구역량을 결집하여 우리 고유의 강점기술을 개발하고, 기초과학육성을 위해 대학의 우수연구센터 7개를 추가로 선정할 것입니다. 또 과학영재를 발굴·육성하고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여 과학문화를 확산해 나갈 계획입니다.
-21세기 각국의 연구개발목표를 보면 나노테크놀로지, 바이오인포믹스 등이 화두에 오르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이미 바이오테크와 정보통신기술을 융합한 새로운 기술을 인간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기술개발에 오래 전부터 집중하고 있는데 우리의 21세기 목표는 무엇입니까.
▲과기부는 생명공학기술 및 나노기술개발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산·학·연 합동의 「21세기 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습니다. 생명공학기술개발을 위해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등 4대 「21세기 프런티어연구개발사업」에 10년간 5000억원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정부는 현재 세계 14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생명공학기술수준을 2010년까지 세계 7위로 끌어올릴 계획이며, 나노기술분야에서는 2010년까지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관의 입장을 떠나 선배과학기술자로서 개인적인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학자의 길을 먼저 내디딘 선배로서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21세기 과학기술을 도맡을 후배 과학자들이 요즘처럼 지식, 환경,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것입니다. 후배들의 고통과 부담도 크겠지만 20∼30년을 내다보는 미래예측력이 있는 과학자가 된다면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미래는 밝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하나는 과학기술 꿈나무가 될 청소년들이 과학기술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주는 것입니다. 과학의 경제적인 가치에 치중하는 어른들보다 동심의 눈으로 과학을 바라보는 학생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정리=정창훈기자 chjung@etnews.co.kr>
<주요 약력>
△서울대 전기공학과 △미국 텍사스 A&M대 전기공학박사 △공사 교수 한국통신 사업단장·품질보증(TDX)단장 △과학기술처 차관 △한국이동통신 사장 △SK텔레콤 부회장
△주요상훈=철탑·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황조근정훈장 △저서=<삶의 한순간을>(75), <미래를 열어온 사람들-통신과 함께 걸어온 길>(96), <나의 선생님>(9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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