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다. 분명한 위기다. 언론과 학자들이 새해 우리 경제를 「제2의 IMF 직전」으로 묘사하며 잇따라 경고음을 울렸지만 꿈적도 하지 않던 정부가 드디어 위기론에 가세했다.
김대중 대통령조차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으니 이제 「한국경제 위기론」은 해외에 이어 국내서도 「공인(?)」 받은 셈이다.
기업과 시장은 예민하다. 경기 후퇴의 조짐을 본능적으로 알아 챈다. 마치 지진이 오기전 쥐들이 먼저 움직이듯 몸을 한껏 낮춘 채 다가올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새천년 첫해 우리 경제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롤러코스트를 탔다면 21세기의 문을 여는 2001년은 지루한 불황의 터널이 기다리고 있다.
새해 2월까지 마무리한다는 공공·금융부문의 구조조정은 노조의 반발에 밀려 표류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의 모럴 해저드는 불치병 수준이 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내놓은 「경제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새해 우리 경제 성장률은 5.1%에 불과하고 특히 정부가 구조조정을 늦추면서 경기대책만으로 국면을 돌리려 한다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내수를 중심으로 경기하강세가 더욱 빨라짐에 따라 새해 상반기 경기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것으로 예측되고 일시적으로 20만명의 실업자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경기의 바로미터인 민간 소비증가율은 7.4%였던 2000년에 비해 절반 수준인 3.7%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KDI의 전망치가 지난 10월의 예상보다 더욱 나빠졌다는 점이다. KDI는 심지어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이 늦어지고 금융불안이 지속될 경우 우리 경제의 하강 속도는 더욱 가파를 것이며 성장률도 전면 재조정해야 할 지경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런 예상은 단순히 경기후퇴 조짐이 아닌 우리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펀더멘털이 약화되는 전형적 모습이어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민간 전문가들의 시각도 비슷하다. 경영자총연합회가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는 새해 경제난 발생 가능성에 대해 90% 이상이 동의했다.
CEO들은 이 때문에 새해 투자계획을 대폭 축소(28.9%), 소폭 축소(26.8%) 등 절반 가까이가 「줄이겠다」고 응답했다. 2000년 수준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29.9%였고 소폭 확대는 14.4%에 불과했다.
기업들을 둘러싼 최악의 시나리오는 금융불안의 여파로 자금시장 역시 꽁꽁 얼어붙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거래소는 이미 2000년 한해 동안 주가가 반토막 났고 코스닥 시장은 10분의 1 토막짜리 주식이 즐비하다.
투자를 하고 싶어도 자금을 조달할 창구가 꽉 막혀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IMF를 벗어나기 위해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발행한 회사채도 새해엔 집중적으로 만기가 돌아 온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이 예측한 바로는 주요 대기업분만 20조∼3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수치도 나온다.
그러나 죽으란 법은 없다. 우리 기업들이 어떤 기업들인가. 전쟁의 폐허에서 한강의 기적을 창조하고 IMF를 단숨에 벗어났던 그야말로 산전수전 모두 겪은 백전노장들이다.
기업들의 새해 전략이 눈길을 끄는 것도 무방비로 당했던 IMF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충분한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IMF 한파를 겪으면서 혹독한 구조조정과 몸집줄이기, 내핍 경영이 몸에 밴 탓인지 위기를 극복해나갈 슬기로운 지혜를 갖추고 있다.
미래 수종사업에는 과감한 투자를 감행하지만 경쟁력이 조금만 뒤처지면 판을 접는 사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어차피 가용 자원은 한정돼 있는 만큼 면밀한 사업성 검토를 거쳐 선택과 집중이라는 테마를 앞세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 벤처정신의 경영 접목, 수익 모델 확충 등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살길은 수출」뿐이라는 전통의 명제도 다시 한번 우리 경제를 살릴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다. 제조업체들은 모조리 새해 경영전략을 수출 제일주의에 두고 있다.
조직과 인력을 수출에 집중하고 CEO들이 직접 뛰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다행히 환율도 달러당 1250원대를 맴돌고 있다. 수출업체들엔 다시 없는 호기다.
새해에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CEO들은 대부분 전자 정보통신분야에, 수출을 겨냥한 것이다.
결국 위기를 극복하려면 실마리는 수출에서 찾아야 하고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 정보통신부문은 그 선두에 설 것이다. KDI 역시 새해 수출은 전자 정보통신의 선전에 힘입어 2000년 대비 10%의 증가율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벤처쪽도 위기가 기회로 다가오고 있다. 묻지마 투자로 상징되는 벤처 거품이 일시에 꺼지면서 지금 당장은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지만 옥석이 가려지는 새해 상반기쯤에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시장의 검증을 거쳐 살아 남는 우량 벤처기업들엔 코스닥 열풍 시절 못지 않은 투자와 기대가 쏠리게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벤처들 역시 이같은 상황을 충분히 읽고 있으며 생존싸움에 돌입했다. 시련이 가혹할수록 살아남는 기업의 전리품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벤처인들은 잘 알고 있다.
특히 고무적인 것은 벤처 신화를 창조한 기업들이 그간의 「국내용」 딱지를 떼고 새해에는 세계를 무대로 지평을 넓혀가겠다는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고속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 장비업체들은 이미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었고 수출에 총력을 기울일 태세다. 차세대이동통신(IMT2000)관련 장비 및 단말기, 부품업체들도 새해를 부푼 기대로 맞고 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도 경기 회복의 일차적 정책 수단을 정보통신분야에서 찾고 있다. 극도로 냉각된 투자탓에 실물 경기가 후퇴한다면 정보통신분야의 투자를 선행 지표로 삼아 경기를 끌고 나갈 것이다.
고용문제 역시 거의 유일하게 팽창되는 시장, 즉 전자 정보통신분야를 고리로 해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새해는 경제 위기라는 거대한 파고가 밀려오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우리 기업들엔 또 다른 도약의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는 약속의 해이기도 하다.
IMF를 거치면서 「기초체력」을 단련한 것도 전자 정보통신분야이고 우리 경제 회생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할 것도 전자 정보통신분야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제 같이 뛰는 일만 남았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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