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한 차림의 키아누 리브스가 검은 선글라스의 괴한들에게 쫓기며 좁은 복도를 달린다. 그런데 도망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벽을 타고 달리는가 하면 현란한 몸동작으로 총알을 피한다. 괴한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급기야는 0과 1로 점점이 분해돼 광케이블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린다. 그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시공을 초월해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인간의 존재와 육체가 송두리째 디지털화하는 일까지 가능해질까. 인류의 발전에 거대한 공헌을 한 컴퓨터는 0과 1, 단 두 개의 정보 단위로만 구성되는 이진법시스템을 채택했다.
이진법은 간단하다.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십진법은 손가락의 숫자를 따 하나에서부터 열까지를 한 단위로 본다. 반면 이진법은 0과 1 다음에는 상위 단위로 넘어간다.
「모 아니면 도」의 원리를 채택한 컴퓨터는 사실은 「켰다(on) 끄는(off)」 단순한 연쇄작용에 의해 운영되는 셈이다. 이 빠르고도 간편한 계산법은 서양 수학자들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라이프니츠가 이진법 산술을 만들어내기 수천년 전 중국에서는 겹치고 교차된 막대기로 점을 보는 것이 유행했는데 이 점괘에 이미 이진법의 논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평범하고 간편한 산술로 여겨지던 이진법이 0과 1로 현실세계에 빚어낸 결과물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미국 MIT 공대의 윌리엄 미첼 교수는 그의 저서 「비트의 도시」에서 『광케이블이 도시 곳곳에 깔리면서 인간의 시공간 개념이 크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이 케이블을 통해 흘러다니는 무수한 0과 1은 전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고 도서관을 거대한 서버로 만들었다. 조지 오웰이 「1984년」에서 묘사한 기계도시에서 또다시 진보한 모습이다.
오늘날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들도 알고 보면 0과 1로 구성된 디지털 문화의 산물이다. 0과 1로 대변되는 디지털 문화, 즉 제로원라이프는 미래가 아닌 현실의 삶 속에 깊숙이 침투해 있다.
시나리오 작가가 꿈인 고등학생 김군의 삶을 엿보자. 그는 최근 인터넷 드라마 제작에 직접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TV와 인터넷방송으로 동시에 시작된 이 드라마는 네티즌의 의견을 반영해 두 매체의 결론을 달리 내리는 방식이다. 수업이 끝나고 PC방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이군은 어젯밤에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MP3 음악들을 들으며 휴대폰을 열었다.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얼마 전 친구들로부터 배운 휴대폰 네트워크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다. 거의 매일 PC방을 찾는 그는 짧은 시간 안에 e메일을 확인하고 곧바로 채팅방으로 향한다. 김군처럼 일상생활에서 인터넷과 무선매체 등을 통해 디지털 문화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예는 이제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일상의 변화가 산업혁명처럼 순식간에 대변혁을 몰고오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인류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다.
디지털이 불러온 가장 큰 변화는 개별 수용자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는 것. 획일적인 문화의 틀을 강요받았던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이제 대중은 양방향 멀티미디어 환경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
김군이 드라마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터넷이라는 무형의 열린 공간은 보다 자유로운 시민의 정치 참여부터 나만을 위한 주문형 상품, 시공을 뛰어넘는 견고한 커뮤니티 형성 등을 가능케 한다. 이에 따라 권력집중적인 사회 구조는 서서히 무너지고 개인의 개성이 좀더 존중되는 사회 풍토가 마련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예측도 대두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첨병인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직장의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고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짐은 물론 원격화상회의 등도 더이상 색다른 풍속도가 아니다.
이동사무실의 실현도 앞당겨지고 있다. 디지털 신호를 매개로 한 이동통신의 급격한 발전은 걸어다니는 업무 환경을 자연스럽게 구현한다.
문화적인 변혁의 파장은 더욱 크다. MP3 파일로 내려받은 음악을 나만의 음악 CD로 편집하는 일이나 DVD 홈시어터를 통해 극장에 버금가는 영상을 안방에서 즐기는 일도 가능해졌다. 극장에 가지 않고 휴대폰으로 티켓을 예매하고 종이 냄새를 맡지 않고 전자책으로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 이로 인해 좀더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취사 선택할 수 있는 편리함도 누리게 됐다.
이처럼 디지털 신세계가 도래하면서 일반인들은 제로원라이프에 걸맞는 정신 개조를 요구받고 있다. 인터넷과 같은 가상공간은 전세계 어디서나 공유 가능한 열린 장인 동시에 개인의 폐쇄공간으로 점점 변형되기도 한다는 것. 이와 함께 디지털 문화가 야기할 역기능 역시 만만치 않다.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살 사이트 소동은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이라는 어두운 단면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는 자살하기 쉬운 장소부터 방법까지 죽음을 부추키는 수백 가지 사례가 제시돼 있었고 「나를 죽여달라」고 스스로를 살인 청부한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또 날로 발전하는 정보통신기술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격을 더욱 벌여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킹과 같이 기술을 악용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YMCA 영상위원회의 이중한 위원장은 『디지털 시대에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가치들에 대한 신중한 선택과 윤리 의식의 재정립이 시급하다』며 『지금까지 인류가 보존해온 가치들에 대한 재인식이 새로운 사회운동의 과제로 대두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도 『점점 확산되는 사이버 공간에서는 공간의 특성상 개인이 불편을 경험하는 정도나 결과가 매우 다양하다』며 『근대 사회의 틀에서 탈피해 새로운 행동 통제와 개인의 책임을 찾는 윤리규범 정립이 필요한 때』라고 충고한다.
『「on」과 「off」의 선택은 미리 정해져 있는 설계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 필요한 선택을 하는 것이며 이런 자기조직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마음가짐』이라는 어느 수학과 교수의 말을 되새겨볼 때다.
<김유경기자 yuky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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