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의 2000 회계연도 상반기(4∼9월) 결산 공개 시즌을 맞아가전 부문을 지니고 있는 대형 전자업체들이 어두운 표정을 감추기에 급급해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이동통신 산업 호황으로 전체적으로는 실적이 뚜렷한 회복세를 나타냈지만 세탁기·냉장고 등 백색가전과 가정용 VCR 등 재래식 AV기기는 실적이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상반기 결산을 내놓은 히타치제작소, 마쓰시타전기산업, 도시바 등 주요 전자업체들의 실적을 보면 도시바를 제외하곤 가전 부문의 매출이 전년동기 실적보다 떨어졌다.
히타치는 가전 매출이 4428억엔으로 3% 감소했고, 영업 이익은 90% 가까이나 줄어 15억엔으로 급감했다. 도시바도 매출이 늘었다지만 영업 이익이 57억엔에 불과하다. 일본 가전의 대명사인 마쓰시타도 가전 매출이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모두 전년동기 실적을 밑돌았고, 영업이익도 55억엔으로 70%나 줄었다.
특히 마쓰시타는 90년대의 장기 침체기에도 백색가전을 축으로 꾸준히 이익을 내며 「가전 명가」의 체면을 유지해 온 기업이기 때문에 이번 결산에 더 큰 실망감을 보이고 있다.
대형 전자업체 이외 산요전기 등 중견 전자업체들도 가전 부문의 적자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부진에 허덕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본 업계 전반에 걸친 가전 부문의 수익 저하는 장기 침체와 그에 따른 소비 위축으로 생겨난 「과당경쟁과 설비과잉」이 주 요인으로 지적된다.
대표적인 예가 에어컨 시장으로 13개사 각축하며 과당경쟁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절반 이상의 기업이 적자를 감수하면서 사업을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품목의 시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실정이다.
업체들은 과잉 설비의 가동률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 수요보다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재고를 없애기 위해 가격을 크게 낮춰 판매하고 있다. 과당경쟁과 과잉생산, 저가판매 등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물론 업체들은 생존을 위한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는데, 특히 외국 업체와의 제휴가 활발하다. 자국내에서의 부진을 외국 시장 개척으로 만회해 보겠다는 의도다.
히타치는 유럽 가전업체 복슈지멘스(BSH)와 제휴, 내년 4월 태국에 세탁기 합작사를 설립해 드럼 방식을 생산할 계획이다. 도시바는 유럽의 가전업체 일렉트로럭스와 손잡았고, 산요전기는 미국 메이카그와 공동개발, 부품 상호공급 등에 대해 포괄 제휴했다.
성장 한계에 도달해 있는 국내 시장에서의 생존책으로 업체간 통합론도 조심스레 대두되고 있다. 고용유지, 양판점의 판매 공간 축소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이미 수면 아래서 나타나고 있는 통합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일례로 산요전기와 도시바가 잇따라 에어컨 사업을 분사한 것은 사업 통합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분사화로 에어컨 사업 단독의 채산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면 시장에서 퇴출되든지 다른 동종 업체와 통합하든지 조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업계는 일본 시장이 단독으로 개발력이나 영업력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버텨나가기 힘든 한계 상황에 와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어디선가 불만 당기면 사업 통합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합종연횡 전야(前夜)에 들어서 있는 일본 가전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관심이 모아진다.
<신기성기자 ksshin@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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