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기계와 인간의 신뢰성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가 부시 후보에 대한 당선발표와 번복, 재검표와 수검표로 이어지는 예상치 못한 일련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최고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나라 미국이 대통령을 뽑는 문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을 허탈하게 하고 있다. 법정문제로까지 비화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선거로 인해 미국 정치는 깔끔함을 잃어버리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상처를 받게 됐다.

미국 대선이 투표일이 10일이나 지나도록 당선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각되는 것은 기계개표에 대한 불신인 것 같다. 기계개표에서 오차가 발견됐고 이 때문에 수작업에 의한 재개표를 요구하는 고어 진영과 이를 반대하는 부시 진영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혼미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기계와 인간 가운데 누구를 더 신뢰해야 하는가라는 숙제를 던져 주고 있다고 하겠다. 플로리다주의 대법원이 최근 수개표의 반영을 결정한 것은 일단 인간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경우처럼 인간이 문명의 이기에 대한 신뢰에 한계를 두는 것은 결국 신뢰에 따른 역작용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이기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용도나 목적이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 대선에서 기계개표가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은 기계 자체의 결함으로 정확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라기보다 기계개표과정에서 인간의 실수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문명의 이기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인간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문명의 이기가 가져오는 역작용도 그 근본은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의 발달과 이에 수반되는 역작용은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되되었다. 네트워크가 점차 세계를 지배하는 구도로 변해가면서 사이버 공간이 삶의 한 공간으로 자리잡자 이전에는 없었던 네트워크상에서의 범죄가 골칫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인터넷은 네트워크상에서 사람들에게 개인정보 도용, 사생활침해 등으로 정신적인 피해를 주는 사이버테러리스트나 남의 컴퓨터에 침입해 금전적인 손실을 입히고 중요한 정보를 훔쳐가는 크래커 등의 범죄자들이 양산돼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다.

그동안 거리와 시간, 공간을 초월하려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비해 반대급부로 나타나는 다양한 역작용에 대한 해결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간과 돈, 인력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미국 대선에 도입된 기계개표도 결과적으로는 국가적인 혼란과 반목을 낳고 있다. 미국 국민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부시와 고어를 지지하는 각각의 유권자들이 적을 대하듯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은 역작용이라는 것을 결코 쉽게 봐서는 안된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하고 있다.

IT강국이라는 기치아래 우리 정부도 전자정부, 전자 민주주의를 준비하고 있다. 각종 민원업무나 행정절차를 네트워크상에서 처리하고 국정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정부 실현은 더 없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또 막대한 자금이 드는 선거와 민의 수렴과정을 가상공간으로 끌어들여 해결하는 전자민주주의 역시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혼란은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전자정부와 전자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결점없는 시스템과 이 시스템을 공정하게 운영할 수 있는 법적·인적 토대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 하는 점은 전자정부와 전자민주주의 구현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정부가 앞으로 관심을 가지고 풀어나가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