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디지털 제품 생존 위협.」
국내 한 가전업체의 내부 문서 귀퉁이에 쓰여진 이 문구는 지금까지 수입선다변화제도가 존재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작성된 이 문서에는 캠코더·디지털캠코더·디지털카메라 등 일부 디지털 제품이 제품의 다양성, 브랜드이미지, 가격경쟁력 부문에서 모두 일본 제품에 비해 열세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장기적으로 국산제품은 수익성 기반을 상실해 해당사업이 도태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일본 상품 공세를 차단하는 마지막 빗장 역할을 해온 수입선다변화제도가 지난해 6월 30일 폐지돼 국내 유통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외산 가전제품의 국내 유입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산업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컬러TV의 경우 외산제품은 총 5만6300대가 수입돼 지난 98년에 비해 81%가 증가했으며 특히 올 들어서는 지난 4월까지 3만5100대가 수입돼 전년 동기 대비 111%의 급격한 신장세를 나타냈다. 캠코더나 VCR도 상황은 컬러TV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날수록 수입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표 참조
물론 이처럼 외산가전의 수입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주요인은 수입선다변화제도의 폐지로 그동안 국내 유입이 막혔던 일산 제품들이 대거 국내에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국내 관련산업을 초토화할 것처럼 보이고 있는 수입증가율 폭증은 지난해 6월까지 일산제품의 공식수입이 막혀 있다가 수입이 자유로워지면서 나타나는 수치상의 현상일 뿐이라는 게 국내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실제 시장점유율면에서 살펴보면 컬러TV는 98년 2.2%, 99년 3.4%, 올 들어서는 4월까지 5.0%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며 VCR도 10% 미만이다.
이미 국내 대부분의 가전산업이 밀려드는 일본 가전제품에 충분히 맞대응할 수 있는 궤도에 올라 있어 아직까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당초 우려했던 것보다는 그 영향이 심각하지 않았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
그러나 캠코더는 상황이 다르다. 98년까지 외산제품의 시장점유율은 0%였으나 유통시장 개방 이후인 99년에는 45.1%, 올 4월까지는 무려 64%에 육박하고 있다. 유통시장 완전개방 이후 소니를 선두로 한 일본업체들이 첫 공략대상으로 캠코더 시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디지털캠코더 같이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한 첨단상품의 경우 앞으로 일본업체의 공세가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보여 이에 따른 국내 업체의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따라서 일본 업체와의 「진검승부」는 1년이라는 과도기를 거친 지금부터이며 국내업체들은 유통시장 완전개방 2년째를 맞아 한층 긴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시장 변화를 지켜보면서 차분히 시장전략을 수립해온 소니조차도 지난 1년 동안은 급변하는 시장상황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해 상당기간 팔 물건이 부족해 사업 추진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다른 일본업체들도 지난 1년 동안 시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따라서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체계화된 공략이 시작되는 올해 이후 국내 가전시장은 일본업체의 입김이 한층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업체가 일본업체의 이같은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경우 상당수 아이템을 일본업체가 장악하는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국내 가전업계는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제품만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일본업체는 자신들이 경쟁우위에 있는 제품을 개발해 상대국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것도 글로벌시대에 부합되는 사업방식이기는 하다. 실제로 대만의 경우 가전제품의 대부분을 외국업체에 의존하면서 PC·주변기기 등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하면서 경제적인 기반을 다져놓았다.
일부 전문가들은 국내 가전산업도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를 계기로 몇년 안에 경쟁력 있는 제품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20여년 동안 취해진 수입선다변화제도 아래서도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제품은 시간이 더 지나도 마찬가지라는 극단적인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모두 가전산업을 모태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상충되는 제품이 너무 많아 앞으로 상당기간은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할 것이다.
국내 가전유통구조의 변화도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 2년째를 맞는 국내 가전업체가 가장 신경쓰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국내 가전유통은 지금까지 전통적인 채널인 국내 가전업체의 전속 대리점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가전업체가 국내시장 진출에 어려움을 겪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내 소비자의 구매 패턴이 대리점 중심에서 양판점·할인점·무점포 유통 등으로 다각화하고 이들 유통업체가 마진율이 높은 수입가전 취급률을 급격히 늘리면서 점차 국내 가전업계의 유통부문 강점이 사라지고 있다.
또 소비자 수준이 높아지면서 가전제품을 생활필수품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독특한 제품, 우수한 기능 등을 중심으로 선택하고 있는 경향이 정착되고 있다.
국내 가전업체도 WTO 체제 출범으로 세계 경제의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더이상 애국심 마케팅 따위에는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일본 등 외국 업체의 제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큼 품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변화가 있다고 해도 수십년 동안 구축해온 유통망과 사후관리(AS) 등 외국 업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입선다변화제도 폐지로 국내 소비자의 일본 가전제품에 대한 인식도 크게 변하고 있다.
우선 「일본제품은 무조건 좋다더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한국인이 일본제품을 쓰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라는 의식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희석되고 있다. 즉 이제 국내 소비자의 관심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얼마나 싸게 구입할 수 있는가에 있다.
실제 유통시장이 개방된 이후 전 가전제품의 가격이 평균 15∼20% 이상 떨어졌다는 것은 소비자에게는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한국시장을 노리는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을 포함한 외국 업체와 국내업체도 이제 국내 소비자에게 권하고 싶은 제품을 엄선하고 소비자가 아무런 불편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 질을 높이는 것이 앞으로 사업성패의 열쇠가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심규호기자 khsim@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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