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128은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과 케임브리지를 잇는 국도를 뜻한다. 1970년대 중반 전세계 컴퓨터 산업의 중심 축은 바로 이 루트128 주변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실리콘밸리만큼이나 유명했고 매사추세츠의 기적이라고 불리며 미국의 컴퓨터 산업을 주도해 나갔다.
당시 보스턴 교외에 자리를 잡고 있던 디지털이큅먼트사와 데이터 제너럴사, 프라임사, 그리고 왕사 등은 메인 프레임(중형 컴퓨터)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의 미니 컴퓨터를 생산해냈고 이 냉장고만한 크기의 미니 컴퓨터들은 자금 여유가 없는 대학이나 기업들에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컴퓨터 산업기술은 끊임없이 진화되고 있었다. 1985년에 접어들면서 매사추세츠는 더 이상 컴퓨터 산업의 선두주자가 아니었다. 컴퓨터 시장은 이제 기술진들과 과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워크스테이션과 일반인들을 위한 개인용 컴퓨터(PC)로 나뉘었고 미니 컴퓨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루트128은 여기에다 1980년대 일본의 메모리 칩(RAM) 시장 독점으로 인해 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다. 일본의 새로운 반도체 생산라인의 형성으로 인해 커다란 타격을 입기는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인텔사와 IBM사는 당시 감원과 구조조정 등을 통해 회사를 연명시켜야만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미국 동부가 잡고 있던 컴퓨터 산업의 주도권이 서부로 넘어오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매사추세츠의 회사들은 워크스테이션시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기는 했으나 실리콘밸리의 베이 지역 회사들이 이 떠오르는 산업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통해 가장 부각된 회사들은 스탠퍼드 대학 출신들이 세운 회사들이다. 휴렛패커드사는 물론이고 1982년 대학원생인 안드레아스 빅톨 샤임의 설계를 토대로 설립된 컴퓨터 판매회사 선마이크로시스템스(Sun Microsystems:「SUN」은 「Stanford University Network」의 머리 글자에서 따왔다), 스탠퍼드 교수 짐 클라크가 개발한 그래픽 프로세싱 칩 상업화를 위해 역시 1982년 설립된 실리콘그래픽스사 등이 대표적이다.
PC의 등장은 실리콘밸리에 새로운 문화를 불어넣기도 했다. 1975년 멘로파크의 한 주자창에는 PC애호자들이 몰려 하나의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스스로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집에서 만들어낸 컴퓨터 클럽이라는 뜻)이라고 명명한 이들의 월례 회동은 몇 개월 안 돼 여러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인파를 끌어 모으게 됐고 그 뒤 스탠퍼드 라이너 액셀러레이션센터(SLAC:Stanford Linear Acceleration Center)의 대강당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야 할 정도로 컸다.
이 클럽은 자유로운 아이디어와 이노베이션(기술 혁신), 그리고 소프트웨어 등의 공유를 하나의 모토로 삼았다. 클럽의 이 같은 발상은 당시 캠퍼스에 널리 퍼져있던 진취적 자유운동(Progressive Liberal Movement)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은 기술을 통해 새로운 지역사회와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데 뜻을 같이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의 컴퓨팅 산업의 질서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대층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76년 만우절에 창업된 애플컴퓨터사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바로 이 홈브루 클럽의 멤버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심한 굴곡을 겪는 애플컴퓨터사가 항상 바닥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른바 애플 마니아들과 추구하는 기술 혁신의 기초가 나온 곳도 이 모임이라는 것은 한번쯤 되새겨 볼 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테리리기자 terry@ibiz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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