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반도체산업 진출
『1982년 5월경이었다. 수많은 미국과 일본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기본 구상이 가다듬어진 1982년 10월에 반도체·컴퓨터사업팀을 조직했다. 이미 개발된 제품들의 성능·원가·가격·시장동향 등을 조사하는 한편, 반도체와 컴퓨터사업의 단·장기계획을 세워 매일처럼 검토에 검토를 거듭했다.
1983년 2월 도쿄에서 최종 마무리를 서두르고 드디어 반도체 투자의 결단을 내렸다. 1983년 3월 15일을 기하여 삼성은 초대규모집적회로(VLSI)사업에 투자한다는 것을 홍진기 중앙일보회장에게 전화로 통보하고, 이를 내외에 공식으로 선언했다. 삼성반도체로서는 가위 역사적인 날이라고 할 것이다. 1년간에 걸친 철저한 기초조사와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연구와 검토 끝에 내린 참으로 힘겨운 결단이었다.』
-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중에서
삼성그룹이 최고 경영자 차원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정하던 1980년대 상황이 잘 묘사된 부분이다. 최고경영자가 일단 결정을 내리자 삼성의 반도체사업 진출 계획은 착착 진행됐다. 삼성은 사업 진출 선언 1년이 되는 1984년 3월말까지 수원 기흥단지에 64KD램 생산을 위한 제1공장을 완공한다는 방침아래 완공시한을 역산하여 모든 일정과 계획을 세웠다. 진척상황은 매일매일 이병철이 직접 챙겼다.
이런 계획에 따라 기술은 미국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 일본 샤프의 것을 중심으로 도입키로 했다. 마이크론으로부터는 64KD램 기술을, 샤프로부터는 상보형금속산화반도체(CMOS)공정기술 및 16KS램 기술을 각각 도입했다. 이 가운데 샤프의 지원은 삼성에 큰 힘이 됐다.
당시 일본 반도체업계는 한국에 대한 반도체 기술 제공에 부정적이었지만 샤프만은 달랐다. 샤프가 외국 기업에 최첨단 VLSI 반도체 기술을 제공한 것 자체가 일본업계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샤프는 삼성에 최첨단 기술을 공여했다 해서 한동안 국익을 해친 국적(國賊)행위기업으로 일본내 여론의 질타를 받아야 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적극 추진할 수 있었던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이 1983년 7월 미국 실리콘밸리의 샌타클래라 지구에 출범시킨 현지법인 트라이스타(Tristar, 나중에 Samsung Semiconductor Inc로 개칭)였다.
출범 후 트라이스타는 VLSI의 설계와 공정개발 등 기술 실무와 기술 인력의 연수를 맡았다. 마이크론이나 ITT와 같은 반도체회사의 기술 도입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트라이스타는 또한 당시 인텔 등 유수의 반도체회사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한국인과학자 이임성, 이상준, 이일복, 이종길 박사 등 최고급 두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반도체회사로 일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주역들이다.
삼성그룹의 반도체사업 진출은 사실 1977년 한국반도체의 인수 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모토롤러 등으로부터 마이크로웨이브 등을 수입하던 오퍼상 켐코(KEMCO)가 미국 ICII사와 50대50으로 합작 설립한 반도체 웨이퍼가공전문업체.
그러나 설립과 동시에 제2차 오일쇼크 등으로 경영난에 봉착하자, 삼성이 1977년 12월까지 지분 100%를 인수하여 그룹사로 편입시켰다. 한국반도체는 1978년 3월 한차례 상호를 삼성반도체주식회사로 변경한 뒤 1980년 1월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부로 흡수 합병된 바 있다.
합병 후 삼성전자는 1981년 8월 경기도 부천의 한국반도체 자리에 연건평 2000평 규모의 반도체연구소를 설립하고 미국의 ITT와 일본의 샤프로부터 관련기술을 도입하는 일을 계속했다.
이 연구소는 삼성전자 소속이었지만 1980년 4월 개소한 삼성종합기술연구소의 부천 분소로서 반도체 연구분야를 전담하던 제7연구팀으로 불렸다. 제7연구팀은 당시 컬러TV방송의 방영으로 불붙은 컬러TV 내수시장 선점을 위한 삼성의 기술전진기지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 팀의 주력연구분야 가운데 하나는 컬러TV용 색신호처리계 집적회로(IC)의 개발이었다.
이병철이 반도체산업의 중요성을 인정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기술혁신의 속도가 빠르고 전자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날로 증대되는 상황에서 반도체사업을 삼성전자의 1개 사업부 조직으로 운영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일본에서는 이미 VLSI 반도체 제품이 쏟아지고 있던 시기에 국내에서는 전자시계용 소자와 트랜지스터, 그리고 집적도가 낮은 IC 등의 생산에 머물고 있는 현실을 통감한 것이다.
그러나 최고경영자가 결정했다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원천기술이 거의 없는 삼성으로서는 대규모 자본 투자가 그만큼 위험스럽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병철이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정하게 된 1983년 2월의 이른바 「도쿄구상」을 놓고 삼성그룹 내에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1989년 간행된 「삼성전자 20년사」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선대회장의 반도체사업에 대한 「도쿄구상」은 위험도가 워낙 커서 삼성그룹의 운명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이병철은 이 당시 그룹사 사장단회의를 열고 『세계적인 추이를 보건대 반도체가 컴퓨터와 통신기기와 같은 산업용기기에 보다 광범위하게 적용돼 간다고 보고 이 분야를 그룹의 주력업종으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천명했다.
이런 결정에 따라 삼성그룹은 1982년 10월 1일자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를 전자교환기 생산 전문계열사인 한국전자통신과 통합하여 삼성반도체통신을 출범시켰다. 초대 사장에는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가 선임됐고 성평건·이윤우·김재욱 등이 가세했다. 한국전자통신은 원래 1977년 정부가 전자교환기 도입과 이의 국내 생산을 위해 산업은행 출자금으로 설립한 국영기업이었으나 교환기 생산의 민영화방침으로 1980년 3월 삼성이 인수한 상태였다.
기술도입선과 조직이 갖춰지자 이번에는 반도체 중에서도 어떤 분야를 선택해야 하는가가 과제로 나타났다. 이것은 기흥단지의 제1생산공장을 착공하기 전에 결정해야 할 숙제이기도 했다. 사업 진출 결정을 전후해서 메모리제품 위주로 추진한다는 기본방향은 세워졌지만 당시 메모리 분야에도 D램, S램, 마스크롬, EP롬, EEP롬 등 종류가 많고 각기 장단점이 있어 선택과정은 쉽지가 않았다.
시장규모·경쟁력·양산효과·향후전망 등을 종합검토한 끝에 처음에는 S램을 전략제품으로 택했다. S램은 D램에 비해 종류가 다양해서 절대수요는 떨어지지만 신규참여가 용이하고 성장속도가 빨라 장차 메모리 시장의 중심제품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시장규모는 작지만 응용범위가 거의 무한한 EEP롬도 초기 전략제품으로 채택이 됐다.
그러나 막상 S램과 EEP롬을 선정해 놓고 보니 현실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우선 시장규모가 D램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 관건이었다. 적정규모의 생산라인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단시일 내에 적정물량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든가, 보다 많은 품종을 확보하여 다품종 소량으로 생산라인을 채워야 했는데 이는 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이 확보할 수 있는 기술수준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치열한 가격경쟁과 공급과잉을 감수하더라도 시장규모가 크고 양산성이 뛰어난 D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삼성은 D램을 전체 생산능력의 50%로 하고 나머지는 기타 메모리 제품과 표준형 성격을 띠고 있는 원칩 마이크로컴퓨터로 채우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1983년 9월에 착공된 기흥 단지 64KD램용 제1공장 건설에는 당시 금액으로 1000억여원
규모의 내외자가 조달됐다. 물론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따랐다.
64KD램용 제1생산공장이 착공된 지 2개월만인 1983년 11월 삼성은 다시 미국현지법인 트라이스타 소속의 이상준을 팀장으로 하는 256KD램용 제2공장 건설팀을 발족시켰다. 256KD램생산라인 건설 과정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논의했던 부분은 웨이퍼의 크기였다. D램의 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결국은 구경 6인치형으로 결정했다.
제1공장은 예정대로 1984년 3월 말일에 준공을 보았다. 같은 해 5월 준공식에는 채문식 국회의장, 고재청 국회부의장, 금진호 상공부 장관, 김성진 체신부 장관, 이정오 과기처 장관 등 정관계인사들이 몰려 이 공장이 갖는 의미를 실감케 해줬다.
이어 1984년 9월 51% 수준의 합격률을 달성한 64KD램이 처녀 생산됐다. 1985년 9월에는 일본기업들의 수준을 능가하는 수율 75%의 64KD램이 생산돼 수출되기 시작했다. 한국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번째 메모리반도체 생산 수출국이 된 것이다. 정부와 이병철은 감격했고 반도체산업의 본고장 미국과 일본기업들은 경이로움과 함께 경계심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 정부가 노심초사하여 삼성측에 『미국과 일본을 자극할 우려가 있으니 일절 비밀에 부쳐줄 것』을 당부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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