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몇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주목받았던 신예 정지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타인은 잠재된 욕망을 자극하지만 평생을 함께할 만큼 안락하지는 않다. 「해피엔드」는 불륜에 빠진 아내와 그녀를 사이에 둔 남편과 정부 사이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형식과 소재 면에서는 낯설지 않게 보아왔던 이야기지만 표현과 메시지에서는 한층 성숙되고 세련된 호흡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감독은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단순히 불륜과 갈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각자의 위치에서 갖는 제각기 다른 사랑의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비애를 느끼게 한다. 멜로에 스릴러적인 요소를 첨가시킨 이 영화는 초반부터 상당히 도발적이며 자극적이나 그것이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해피엔드」가 갖는 힘이다.
10년 전의 첫사랑과 가정을 가진 여자의 격렬한 정사가 당혹스러워질 즈음 가정으로 다시 돌아온 여자의 일상적인 편안함과 안주는 오히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전해준다. 영화는 겉으론 단란해 보이는 가정과 바깥 세상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행되다가 서로가 다른 영역으로의 침범을 시도하면서 점차 위험을 예고해간다. 감독이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도덕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이며 희망적이기보다는 악몽을 꿈꾸듯 씁쓸함이 묻어난다.
영어학원 원장이자 딸을 둔 최보라(전도연). 은행원이었던 남편 민기(최민식)는 IMF 이후 실직하고 중고책방에 가서 연애소설을 뒤적거리거나 탑골공원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소심한 남자다. 보라는 웹디자이너로 일하는 첫사랑 인범(주진모)과 재회하고 그와 「자유로운 외도」를 즐긴다. 그녀는 인범에게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관계이고 싶다』고 얘기하지만 이미 둘에겐 어려운 일이다. 보라가 인범의 옆집 여자를 의심하며 질투하듯, 인범은 보라와 함께 살고 싶다는 집착에 빠져 아기 옷을 사다 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를 위해 식탁을 준비하고 TV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흘리던 민기의 평화로운 일상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다. 아내의 열쇠고리에 달려 있는 낯선 열쇠, 평상시보다 길어진 자동차의 주행거리, 인범과 함께 있는 원장실에서 목격한 아내의 맨발 등, 민기는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한편 보라 역시 인범의 집착에 버거워하고 그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여놓고 외출한 아내의 행동에 분개한 민기는 급기야 아내에 대한 살인을 꿈꾼다.
「해피엔드」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구구절절한 이야기보다는 섬세한 터치로 감정의 변화나 극의 흐름을 암시,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기가 아내에 대한 살의를 느끼면서 연애소설 대신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다거나 보라가 자신과 같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민기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든가 하는 장면 등은 복잡하고 미묘한 이들의 심리를 대변해주고 있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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