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TV시대
3공화국 때 통용되던 80년대의 상징어는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GNP 1000달러」였다. 이 상징어는 우리나라가 곧 대망의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약속의 말」이기도 했다.
약속의 말은 1977년에 달성됐다. 수출 100억4600만 달러, 1인당 GNP 1011달러. 3년 앞당겨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1980년은 더욱 기다려졌다. 그러나 막상 다가온 80년의 경제 지표는 암울한 것이었다.
전년도 대비 마이너스 5.7% 성장.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10% 이상의 플러스성장을 거듭하던 터여서 충격은 컸다. 연평균 40% 이상의 경이적 성장률을 기록하던 전자산업 생산규모 역시 전년도 32억8100만 달러에서 28억5200만 달러로 13.1%나 감소했다. 내수는 더욱 심각해서 가전기기의 경우 전년도 대비 판매량이 36.6%나 감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수부진은 업계의 자금난을 가중시켰다. 전자업계를 대표하던 화신전자·정풍물산·동남전기·오림포스전자·울트라전자 등 중견기업들이 부도를 냈다. 이 여파로 60여 개나 되는 중소 부품업체들이 연쇄도산의 아픔을 겪었다. 납품대금과 임금을 생산품으로 대신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정부가 앞장서 기업들에게 불황타개를 위한 궐기대회를 열게 하고 고용감축과 신규사업 억제 등 감량경영을 펴게 했지만 근본적인 대응책은 될 수 없었다.
전자산업을 포함한 경제 전반이 악몽의 1980년을 맞이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됐다. 첫번째로는 1978년 12월의 제2차 오일쇼크의 여파가 도마에 올랐다.
제2차 오일쇼크의 진원지는 회교혁명을 통해 친미(親美) 팔레비 왕조를 축출한 이란이었다. 당시 이란은 정치 및 경제적 혼란을 이유로 자국내 원유생산을 대폭 감축하고 수출을 중단했다. 이 결과 제1차 오일쇼크 때인 1973년 말의 배럴당 10달러선의 원유가격이 20달러 선을 돌파하는 등 폭등세로 돌아섰다.
이것이 제2차 오일쇼크인데 이 여파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 4.0%에서 1979년 2.9%로 낮아졌고 전세계 비산유국의 적자폭도 460억 달러에서 550억 달러 대로 늘어났다.
제1차 때 다른 나라에 비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우리나라 경제는 앞서 설명했던 대로 극심한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2차 쇼크 때 타격이 컸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차 쇼크 때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었다. 1차 때의 쇼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우리 정부는 석유나 인건비 의존도가 높았던 당시 경제 체질을 개선하지 않은 채 곧바로 중화학 공업중심의 경제확대 정책을 폈다.(제28회 중화학공업육성계획 참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기업들은 심각한 원자재난과 임금상승요인을 안게 됐던 것이다.
두번째는 3공화국의 종말을 고한 1979년의 10·26과 이것에 이어진 1980년의 정치·사회불안이 도마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밖으로 주요 수출국인 미국과 유럽이 강력한 수입규제조치를 취하던 때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내수 부진까지 겹쳤다. 전자산업의 경우 대표 상품이었던 흑백TV의 경우 이미 일반 보급률이 90% 대를 웃돌아 시장 상황도 매우 불투명한 지경이었다.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막혔던 경제에 숨통을 트여줌으로써 업계가 스스로 활로를 찾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이 숨통이 바로 컬러TV방송이었다. 정부는 1980년 12월1일부터 컬러TV방영을 전격적으로 결정했다. 1974년 한국나쇼날이 처음으로 컬러TV의 생산을 개시한 지 6년 만이었고, 1977년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대규모 생산에 나선 지 3년만의 일이었다.
오래 전부터 컬러TV의 생산과 공급체계를 갖춰 놓고도 컬러TV방송을 늦춰 온 것은 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최고 통치권자의 반대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오히려 컬러TV방송은 『과소비를 조장하고 국민 계층간의 위화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우려감을 나타내며 방영 시기를 계속 지연시켰다.
1980년 새 정부가 들어서자, 컬러TV방송문제가 다시 거론됐다. 한국전자공업진흥회 회장 김완희를 필두로 삼성전자 사장 강진구, 금성사 사장 허신구 등이 집중적인 대 정부 로비를 펴기 시작했다. 이 때 정부 쪽에는 상공부 장관 신병현과 국보위 상공자원분과위원회 위원을 거쳐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일하던 오명 등이 적극 나섰다.
이에 앞서 8월 1일부터는 업계 의견을 일부 수용하여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방식 컬러TV의 국내 시판이 허용됐다. 그러나 이 결정은 12월 1일의 컬러TV방송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여론은 경제논리와는 별개로 여전히 컬러TV방송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때는 주한미군방송(AFKN)이 컬러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는데 그나마 시청자 대부분은 수입한 외제수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컬러TV의 내수 허용은 그러니까 AFKN시청자 수요만이라도 확보하여 업계의 숨통을 트여주려던 정부의 고육책인 셈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AFKN의 시청자가 외국인 내지는 부유층이어서 국산TV 판매는 저조했다. 이 과정에서 상공부 전자전기공업국장이던 이동훈이 전면에 나서 업계 간담회를 갖는 등 분위기를 돋웠다. 이동훈은 컬러TV의 핵심부품 개발이 국내 경제발전에 가져다 줄 효과를 집중으로 부각시키는 일을 했다. 전자공업진흥회가 주최한 공청회를 통해서는 TV수상 방식을 놓고 미국식 NTSC, 독일식 PAL(Phase Alternation Line) 그리고 소련 등 일부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던 SECAM(Sequencial a Memoire)이냐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수상방식에 대한 논의는 이미 NTSC식 제품을 개발해서 수출에 나서고 있던 삼성전자와 금성사 등 업계와 PAL방식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학계 등이 맞서 사회적 논란으로 번져 한때 과열양상까지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 1980년 11월 10일 국무회의에서 12월 1일을 기해 NTSC방식의 컬러TV방송이 결정됐다. 컬러TV방송은 적어도 전자산업 활성화에는 적지 않은 부양효과를 거뒀다. 1981년 우리나라 전자산업 총생산 규모는 37억9100만 달러, 수출은 22억1800만 달러로 1980년에 비해 각각 33%, 11%의 성장을 가져왔다.
1980년 12월 컬러TV방송을 전후해서 사회적으로 이른바 「컬러화」바람이 강하게 불기 시작했다. 컬러화 선풍은 모든 분야에서 소비패턴의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졌다. 바람의 진원지는 당연히 컬러TV를 생산하던 가전회사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컬러TV시장은 금성사와 삼성전자가 양분하다시피 했다. 두 회사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되던 때였으므로 시선을 끌 수 있는 신모델의 개발과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우리나라 전자산업 역사에서 소비자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가전 제품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두 회사는 전자회사로서 사활을 컬러TV시판 경쟁에 걸었다. 1980년을 전후해서 3∼4년 동안 두 회사는 수십여 종의 신 모델을 개발했다.
금성사의 경우 1980년의 「하이테크」시리즈 등 1982년까지 모두 80여종의 신 모델들을 쏟아 내놨다. 신 모델들은 갖가지 아이디어 부가기능들이 채택돼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1979년 9월에 개발된 CNP 804라는 모델은 세계 최초로 컴퓨터 기능을 내장했다해서 화제가 됐다.
컴퓨터기능이란 전자시계가 내장돼 있어 원하는 시간에 전원을 개폐할 수 있고 채널을 자동 전환할 수 있으며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금성사는 이어서 20인치 컬러브라운관에 5인치 흑백브라운관을 함께 내장한 2화면(POP:Picture Out Picture) 방식의 CNB 205(1980년)와 45인치 스크린을 채용한 프로젝션TV PJT 4500(1982년), 전원개폐, 음량조절 등을 음성으로 조작할 수 있는 음성인식TV CVT 815(1981)등을 개발해서 소비자들의 시선을 모았다. 리모컨TV인 CNR 842K(1980년)도 이때 선을 보였다.
삼성전자는 1981년 「이코노빅」시리즈를 연달아 내놓아 금성사의 신 모델에 대응했다. 삼성전자 역시 국산TV의 고부가가치 경쟁이 시작된 1983년 이전까지 「이코노빅」을 포함해서 약 70여종의 신 모델들을 출시하여 시장 선점 경쟁을 벌였다.
삼성전자의 「이코노빅」시리즈는 신 모델의 부가 기능에 마케팅의 초점을 맞춘 금성사의 「하이테크」시리즈와 달리 컬러TV가 소비전력이 높다는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절전 기능에 마케팅의 초점을 맞췄다. 이른바 프리볼트형 제품이었던 이 모델은 경쟁 제품에 비해 소비전력을 44%나 절감할 수 있다는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금성사의 POP형TV에 맞서 녹화된 VTR테이프를 재생하면서 동시에 TV를 시청할 수 있는 PIP(Picture In Picture)라는 TV(1980년)도 내놨다. 이밖에 삼성전자는 적외선 주파수변조(PCM)방식의 원격조정장치를 채용한 105채널 케이블TV(1982년), 19인치TV수상기 70대를 연결하는 파노라마스크린(1982년) 등을 발표했으나 시판용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경쟁사를 의식한 기술과시용 성격이 강한 것들이었다.
국산TV 시장은 삼성전자가 「이코노빅」시리즈를 단종하고 1983년 본격적인 고부가가치 모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음성다중TV인 「엑설런트」를 출시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현진기자 jsuh@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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