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전산업에 2000년은 단순한 세기의 변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가전산업이 태동된 지 40년 만에 국내 가전산업의 근본을 뒤바꿀 수 있는 변화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가전업체들에 2000년은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도태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게 업계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우선 시장상황에서만 본다면 IMF 이후 극심한 침체를 나타냈던 가전시장이 올해를 기점으로 점차 회복국면에 접어들고 있어 내년 이후에는 IMF 이전 수준으로 경기가 되살아날 것이라는 데는 업계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더구나 소비자들의 구매행태가 IMF 직후 저가보급형 제품에서 고가의 대형·고기능 제품에 집중되면서 시장확대를 부추기고 있다.
29인치 이상 완전평면TV, 600L급 이상 초대형 냉장고, 패키지 에어컨 등이 시장주도품목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올들어 본격적으로 출시되고 있는 프로젝션TV·디지털TV 등도 점차 시장을 확대해 가고 있다.
이같은 경기회복과 맞물려 내년부터 국내 가전시장이 확대되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 돼왔던 특별소비세 폐지로 시장이 활성화되는 데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컬러TV·VCR·오디오 등 가전주력제품들이 전반적으로 현재의 가격보다 평균 12% 정도 가격이 인하되는 만큼 수요가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것.
더구나 정부가 특별소비세 폐지를 지난 8월에 발표하면서 실구매자들이 제품구매를 내년 특소세 인하 이후로 연기하고 있어 이들 수요까지 합세할 경우 내년도 가전시장은 예상외로 폭발적인 증가도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각 메이커들이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대대적인 판촉활동을 전개하고 IMF 이후 부도위기에 몰렸던 아남전자·해태전자 등도 경영정상화와 함께 본격적인 시장경쟁에 나설 것이라는 예상도 시장확대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렇지만 이같은 상황변화에 편승한 수입선다변화조치 해제로 국내 시장진입을 망설여왔던 세계 최고의 일본 가전업체들도 본격적인 한국시장 공략에 나설 것으로 예상돼 국내 가전업체들을 심각히 위협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일본 업체들의 공세가 강화될 경우 비록 시장규모는 팽창하겠지만 올해 5% 정도에 불과한 일본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내년에는 10%선으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 가격표시제도의 폐지로 가격결정권이 메이커에서 유통업체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그동안 국내 가전유통시장을 장악해온 가전업체들에는 판매가격 하락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는 물론 대형유통업체에 밀려 출하가 이하로 제품을 공급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할 것으로 보인다.
내수시장과 함께 수출시장도 호전돼 이미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70% 선을 넘고 있는 국내 가전업체들에는 매출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중국·인도 등 잠재수요가 큰 거대 시장이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중동 및 아시아지역도 경기회복에 따른 수요창출이 가능할 것이란 예상도 국산 가전제품의 수출에 활로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올해부터 시작된 미국 및 유럽 등 선진국으로의 수출이 내년 디지털TV·에어컨·완전평면TV·고급형 세탁기 등 고급첨단제품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여 수출의 양적·질적 고도화도 가능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처럼 가전시장을 둘러싼 국내외 환경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이를 국내 가전산업이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새로운 밀레니엄시대가 디지털시대를 알리는 한해가 될 것이 분명한 만큼 국내 가전업계도 가전제품에 디지털기술을 접목시킨 정보가전제품의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것은 기존 가전시장을 주도해온 아날로그제품이 디지털 생활에 필요한 정보가전제품으로 전환을 요구하게 되고 이같은 정보가전의 등장은 국내 가전산업의 구도를 근본부터 재편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특히 새롭게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디지털TV·DVD플레이어·디지털VCR 등 디지털기술을 채택한 정보가전제품들이 내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돼 초기 시장을 주도하지 않고서는 세계 가전시장에서 영원한 낙오자로 남을 것이다.
지난 40년간의 아날로그시대에는 국내 가전업체들이 후발주자라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 업체들의 뒤를 쫓아갔지만 디지털시대에서는 일본과 동등하게 출발한다는 것은 국내 가전산업이 일본을 누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들도 가격위주의 경쟁에서 탈피해 창의력과 기술력, 아이디어로 승부할 수 있는 디지털시대의 경쟁력을 갖추어 나가는 게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존 아날로그제품에 대해서는 국내외 경쟁업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선택과 집중 전략의 도입이 필요하다.
그동안 국내 가전업계가 백화점식으로 모든 제품의 구색을 갖춰 놓고 사업을 전개해왔지만 기업의 전문성과 수익성이 기업에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돼 이에 걸맞은 과감한 체질개선 노력이 필요하다.
채산성이 없거나 경쟁력이 뒤지는 사업은 과감히 중소기업에 이관하거나 분사 등을 통해 전문화하고 일관생산체제의 구축으로 사업포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일본 가전업체들과 마찬가지로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는 등 전반적으로 국내외 사업장의 재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 세계 80여곳에 산재한 생산 및 판매법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도 선행돼야 한다.
IMF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았던 국내 가전산업에 2000년은 40년 만에 대대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시련의 한 해가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21세기 도약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도전의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양승욱기자 swya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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