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끝없는 혁명 (17);제 2부 산업의 태동 (8)

KIST의 출범

 1960년대 중반 전자산업정책의 기조는 수입대체산업에서 수출전략산업으로 전환됐다.수출을 위해서는 해당품목의 국산화가 필요했고 국산화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공업기술기반 구축이 절실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공업기술기반의 중심이 된 곳이 바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현 한국과학기술연구원)다. 1966년 2월의 KIST 설립은 특히 이듬해 4월 정부조직법의 개정과 함께 과학기술처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KIST의 설립은 1965년 5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미국방문이 촉매제가 됐다. 5·16 이후 민족주의노선을 걷던 박 대통령이 존슨(Lyndon B Johnson )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일종의 정치적 거래에 의한 결과였다. 이를테면 미국은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한국은 이에 대한 미국의 대가, 즉 경제원조나 국군의 현대화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박­존슨 정상회담은 냉랭했던 한·미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전자산업발전에도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1965년 5월 18일 두 정상은 회담 후 백악관 뜰에서 12가지 의제에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성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박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 가능성을 한국의 공업계·과학계·교육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검토하기 위하여 자신의 과학기술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존슨 대통령의 제의를 환영한다』고 회답했다.

 이날 성명문에서 KIST에 관한 내용은 대통령 수행원들조차 모르게 마지막 순간에 삽입된 것이었다. 초대 KIST 소장을 역임한 최형섭(崔亨燮, 현 과총회장)이 당시 주미대사였던 김현철(金顯哲, 내각수반 역임)을 통해 전해 들은 바로는 다음과 같은 내막이 있었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의 파월 결정에 대해) 박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선물을 하려고 백악관 과학기술담당 특별고문 도널드 호닉(Donarld F Hornig) 박사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호닉 박사가 공과대학을 만들어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는데 박 대통령이 간곡히 공업기술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최형섭 회고록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1995년 조선일보사>

 그러나 공동성명의 마지막 구절(제12절)에 전격적으로 추가된 이 내용은 당시 「파월(派越)」과 「경제원조」 등 정상회담의 핵심 주제어들에 밀려 언론으로부터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만 5월 20일자 한 신문만이 해설기사를 통해 『…워싱턴에서 전해오는 그 많은 「파격적」이니 「이례적」이니 하는 의전 대접에도 불구하고 경제원조 분야에선 파격도 이례도 없다. 한가지 파격이 있다면 한국정부가 전혀 제안도 준비도 한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대통령은 학교 교사로서 과거 경력을 상기하고…존슨 대통령이 먼저 제의한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의 설치 가능성을 검토할 과학고문의 파견」뿐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기사를 쓴 이가 바로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90년 제13대 과기처 장관으로 입각했던 당시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 김진현(金鎭炫)이다.

 가능성에만 머물러 있던 KIST 설립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동성명 발표 이후 꼭 9개월 만인 1966년 2월 KIST는 간단한 조직이었지만 서울 종로5가, 지금의 기독교방송 부근 한 빌딩의 임시 사무실에서 발족됐다.

 이에 앞서 1965년 7월 백악관측은 대통령 과학기술담당 특별고문 호닉을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을 서울에 파견했다. 조사단은 같은해 8월, 연구소는 한·미 양국의 재정지원으로 설립하며 연구 자율성과 인력 유치에 필요한 예산상 신축성이 보장되는 비영리 독립기관이어야 한다는 점과 한국 산업계와 유대강화를 통해 새로운 산업활동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연구소가 자리잡기까지 유능한 외국기관의 지원과 장기적 유대가 요망된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호닉 보고서」를 백악관에 제출했다.

 백악관은 이어 KIST 설립과 관련하여 미국 대통령의 임무와 역할을 다음과 같이 확정 발표했다.

 ①대통령은 미국 정부와 함께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한다.

 ②대통령은 조속한 시일내에 연구소 설립을 위한 책임을 국제개발처(AID)에 부여한다.

 ③대통령은 AID로 하여금 지정된 공업연구기관과 용역계약을 체결토록 한다.

 여기서 나중에 「AID로 하여금 지정된 공업연구기관」이 바로 KIST 설립을 전후하여 한국정부와 과학기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국의 바텔(Battelle)기념연구소다. 백악관측이 명성을 날리고 있던 GE나 웨스팅하우스를 제치고 지방 소도시(오하이오주 컬럼버스시)의 연구소였던 바텔을 지정한 것은 이곳이 비영리재단 연구소라는 이유에서였다.

 바텔연구소는 미국 정부를 대신한 AID와 용역계약을 체결하고 KIST 설립과 초창기 연구소 운영에 깊숙이 관여를 했다. 바텔의 첫번째 임무는 「KIST 설립 및 조직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1966년 KIST 설립과 지원에 관한 한·미협정서 및 연구소 설립 정관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기초된 것이었다.

 초기 KIST 운영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연구소에서 근무하게 될 과학자들의 태부족 사태였다. 바텔연구소 보고서는 이를 미국 등 해외에 거주하거나 유학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의 유치를 통해 해결하도록 건의하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최형섭 소장은 1966년 직접 인터뷰에 나서 유타대학·하버드대학·컬럼비아대학 등에서 연구중이거나 유학중인 한국인 과학자들을 파격 대우하며 선발하기도 했다.

 KIST 출범 이후 정부와 과학기술계 일각에서는 과학기술진흥시책을 전담하는 각료급 독립부처를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무엇보다도 시급했던 것은 과학기술 인력양성이나 국가적 차원의 과학기술 비전을 수립할 수 있는 강력한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역할이었다. 독립부처 설치에 대한 의견은 사실 해방 이후부터 계기가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부」의 신설이라는 일관된 목소리로 흘러나오고 있었고 5·16 후에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관련부처의 설치를 검토하도록 내각수반에 지시한 바 있었다. 이때 정부는 1963년 8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년) 중에 관련부처를 신설하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힘으로써 과학기술부 설치안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과학기술처 신설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은 1966년 11월 제10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행정기구의 설립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듬해 1월 5일 경제과학심의회의는 「과학기술원 설치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때 이 방안을 마련한 사람은 나중에 초대 과기처 장관에 오른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김기형(金基衡)이었다. 미국에서 막 귀국했던 그가 외국의 여러 사례를 검토해서 작성한 이 방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였다.

 ①신설 과학행정기구는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을 주축으로 조직한다.

 ②이 기구는 집행부처가 아니며 다만 참모와 계획부서의 성격을 지닌 업무를 수행하는 「과학기술원」으로 하고 총리 직속으로 두되 규모는 작게 만든다.

 ③각 부처에 산재돼 있는 과학기술행정 관련기관을 흡수하되 관계부처 고유 업무와 직접 관계가 없는 연구소와 시험소만 흡수하여 각 부처의 저항을 최소화한다.

 김기형이 제출한 「과학기술원 설치방안」은 곧바로 정무담당 무임소 장관실에서 접수하여 법률적 검토를 마친 뒤 1967년 2월 청와대에 보고됐다.

 최종적으로 명칭이 「과학기술처」, 소속은 총리실로 된 「과학기술처 설치를 위한 법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곧이어 1967년 3월 임시국회에서 정부조직법이 개정 공포됐다. 이로부터 한달 후인 4월 21일 서울 정동의 원자력원 청사에서 2실(기획관리실·연구조정실) 2국(진흥국·국제협력국) 10과의 본부조직과 산하조직으로 원자력청·국립지질연구소·중앙관상대 등을 둔 과학기술처가 정식 발족했다. 중앙정부 부처로서는 미니급이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최초의 과학기술 전담부처였다.

 1997년 간행된 「과학기술30년사」에 따르면 출범 이듬해인 1968년 우리나라 총예산은 2657억원, 그 가운데 과학기술 관련예산은 3.8% 정도인 103억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과기처가 집행할 수 있는 소관예산은 26억원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기처는 출범과 함께 국가차원에서 과학기술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력양성을 주도했으며 과학기술진흥위원회의 설치 등 과학기술체제를 차근차근 정비해 나갔다. 또 하나 과학기술처는 전자산업 기반조성 등에 관련해서 국가차원의 과학기술투자를 종합 조정하는 막중한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과기처 예산은 최근까지 경상가격으로 연평균 34%씩 가파른 신장을 계속했다.

 한편 과학기술처의 출범을 두고 당시 야권과 언론에서는 『과기처 설치는 대통령 선거(제6대)를 10여일 앞두고 급조된 선심정책』이라는 요지의 따가운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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