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화
◇70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물리학과 졸업
◇76년 미국 피츠버그대 물리학 박사
◇78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질량연구실장, 압력진공연구실장, 진공연구실장, 진공표면분석 연구실장, 진공연구실장 역임
◇현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압력진공그룹 책임연구원, 한국진공학회 이사,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부회장
진공이라는 단어는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적인 의미는 주변 대기보다 낮은 압력의 일정 공간을 뜻한다. 진공기술이란 임의의 공간으로부터 기체 입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진공을 발생시키고 그 안에서 각종 실험 및 생산을 가능케 해주는 기술을 말한다. 따라서 진공 그 자체로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다만 제조과정의 밑바탕을 제공하는 기술이다. 예를 들면 여자들이 아무리 색조화장에 공을 들여도 피부가 거칠면 아무 소용이 없듯이 첨단부품이나 공정에 많은 돈을 들여도 진공 기본이 잡혀있지 않으면 좋은 품질의 제품이 나오기는 어렵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우주는 연속적인 물질로 차 있으며 자연에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같은 그릇된 사고는 토리첼리(Toricelli)가 1643년 유명한 수은주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 진공을 발견하면서 깨졌다. 토리첼리 이후 보일(Boyle)·샤를(Charles)·랑그뮈아(Langmuir)·게데(Gaede) 등에 의해 진공이론이 확립되고 초기 진공기술이 개발됐다. 실험실에서 진공발생이 가능해지면서 원자 및 원자핵 과학기술을 태동시켜 수많은 노벨수상자들이 배출됐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유리제 용기와 수은을 사용하던 까다로운 소용량 실험실용 진공장비들이 금속 체임버와 고무 오링을 사용하는 튼튼한 생산장비로 발전했고 또 수은 대신에 증기압이 낮은 기름을 사용하고 헬륨 리크 검출기술이 개발돼 고진공기술이 발전됐다. 그 뒤를 이은 미·소 냉전 중의 우주개발경쟁으로 초고진공기술이 개발됐다.
진공기술은 곧 반도체산업에 응용됐으며 현재 반도체 관련산업 및 연구가 진공기술의 발전을 선도해 가고 있다. 진공의 응용범위가 넓어지면서 진공상태에서 화학 및 플라즈마 반응 등의 필요에 따라 갖가지 크기와 디자인의 밸브, 기체나 전기의 도입단자, 계측 및 제어용 부품, 각종 공정부품들이 개발됐다. 소자의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높은 초청정(超淸淨)진공이 요구되어 특수표면처리나 소재의 청정도가 필요하게 됐다. 펌프에서 진공시스템으로 역류되는 미소한 기름증기도 치명적이므로 로터리펌프 대신 건식 진공펌프를 사용하고 터보분자펌프도 재래식 베어링이 아닌 자기식 또는 세라믹 베어링을 사용하는 등 펌프의 전체적인 무유화(無油化)가 진행되고 있다.
극미세 구조의 관측을 가능케 하는 각종 전자현미경을 비롯한 표면과학장비는 초고진공상태에서의 극도로 정교한 전자빔이나 이온빔 제어 및 위치제어기능을 요구한다. 또 3차원 소자 및 나노기술의 개발을 위해서는 극고진공기술을 필요로 해 일본 등 선진국에서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우리가 숨쉬고 있는 대기의 압력 1기압(㎩ : 파스칼로 읽으며 압력의 국제공인 단위. 1밀리바=100 ㎩이다)은 대단히 커서 A4용지 위에 630㎏의 무게가 올려 있는 것과 같은 정도다. 대기가 걷혀 이 압력이 제거된다면 우리들의 몸은 팽창하고 피가 끓고 순환기능이 마비되어 생명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진공청소기·진공이송 등은 한쪽을 진공으로 만들어 밖의 대기가 미는 힘을 이용한 것이다. 진공 중에는 산소가 부족하다. 따라서 진공포장을 해두면 식품을 오래 저장할 수가 있다. 항공기 소재 등은 진공주조를 해야 기포가 없이 견고한 특수소재가 된다. 초전도과학은 액체질소나 액체헬륨과 같은 극저온용기인 듀어의 발명으로 발전될 수 있었는데 듀어는 이중벽 사이 진공의 단열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초고진공상태에서는 입자가 다른 분자와 충돌하지 않고 긴 거리를 비행할 수 있다. TV브라운관 안은 초고진공이므로 전자총을 떠난 전자는 도중에 다른 분자와 충돌해 없어지지 않고 스크린까지 진행, 명확한 상을 보여준다.
방사광가속기의 내부는 ㎩ 이하이기 때문에 전자빔은 수천 ㎞의 거리를 주행할 수 있다. 진공상태에서는 플라즈마가 쉽게 발생되고 유지되므로 핵융합을 비롯한 각종 플라즈마 연구 및 응용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초고진공상태에서는 표면에 입사하는 기체분자수가 극도로 줄어든다. 따라서 기체분자로 덮이지 않은 순수 고체표면을 장시간 유지할 수 있으므로 표면의 극미세구조 및 조성을 분석하거나 조작할 수 있다.
진공상태에서는 원하는 박막을 입히거나 역으로 표면층을 벗겨낼 수도 있다. 알루미늄을 유리면에 증착시키면 거울이나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반사경이 된다. 또한 티타늄과 질소를 적당히 조절하여 증착시키면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금색깔이 나오므로 고급시계, 안경테, 기타 장식품에 많이 쓰이고 있다. 부식성 재료표면에 내식성 피막을 입혀 보호하며 공구 끝에 초경피막을 입혀 수명을 연장시킨다.
군사용으로 쓰이는 적외선 자외선 감지센서, 광다이오드 등도 진공박막기술로 성장됐다. 반도체 칩을 만드는 전공정은 주로 박막을 형성하고 식각에 의해 원하는 패턴을 만드는 기술이 반복적·집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CRT나 평판 디스플레이용 스크린은 유리에 ITO 및 금속막을 증착시킨 것이므로 우리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컴퓨터는 진공기술의 총화인 셈이다.
현재 실험실에서 다루는 진공의 범위는 ㎩로 16차수(decade)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이라 다음과 같이 통상 5개의 영역으로 구분되며 영역별로 발생 및 계측기술 그리고 응용분야가 달라진다. 첫째, 저진공 영역을 보자. 이 영역의 진공발생은 로터리펌프나 드라이펌프 등 기체압축기 원리로 배기하며 냉동건조·진공청소기 등에 쓰인다. 압력차에 의한 힘에 의해 액주나 센서부분이 변형하는 정도를 감지해 압력을 측정하는 액주형압력계, 부르동관 게이지, 전기용량 격막식 게이지(Capacitance Diaphragm Gauge) 등이 사용된다.
둘째, 중진공 상태다. 압력차에 의한 힘은 거의 무시할 정도라 이 영역의 압력측정은 기체분자가 가열된 필라멘트와 충돌해 열에너지를 분산시켜 필라멘트의 온도가 압력에 비례하며 내려가는 원리를 이용한다. 필라멘트의 온도강하를 열전대(TC)로 측정하는 것이 열전대 게이지, 저항변화로 측정하는 것이 피라니 게이지다. CVD 등의 박막장비, 진공 야금, 광학부품, 레이저, 전자산업 등에 사용된다.
셋째, 고진공 영역이다. 이 영역부터 기체분자들은 상호간의 충돌이 거의 없으므로 집단적 유체특성을 보이지 않고 개별분자적 특성을 보이게 된다. 터보분자펌프는 고속운동하는 회전체가, 유확산펌프는 초음속으로 분사되는 증기분자가 기체분자 개개를 쳐서 펌프작용을 하게 된다. 가열된 필라멘트 또는 페닝방전 등의 방법으로 발생시킨 전자를 가속시켜 기체분자를 이온화시키고 이 이온들을 집속하여 이온전류를 측정함으로써 기체분자밀도, 즉 압력을 측정한다. 이온주입·스파터 등의 공정에 사용되며 고품위 박막제작에 사용된다.
넷째, 초고진공이다. 이 영역에서는 터보펌프·유확산펌프에 더하여 기체 흡장식 펌프들도 사용된다. 스파터 이온펌프는 기체분자를 펌프 내면에 화학적 결합으로, 크라이오 펌프는 기체분자를 얼어붙게 하여 기체분자가 챔버 내부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게 함으로써 배기작용을 한다. 초고진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펌프의 배기속도를 아무리 키워도 소용없으며 용기 및 펌프 소재로부터 방출되는 수분을 제거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전체 시스템을 150∼200도 정도로 가열해야 한다. 고무 오링은 사용할 수 없고 금속 가스켓을 사용해야 하며 모든 부품의 방출기체량은 철저히 제한되어야 한다. 이 영역은 고성능 전자현미경, 핵융합로, 방사광가속기, 표면과학, MBE, 우주과학 등의 첨단연구에 응용된다.
다섯째, 극초진공이다. 수분을 제거한 후에도 소재 내부로부터 계속 방출되는 CO와 수소를 제거하기 위해 350도 이상에서 장시간 가열해야 한다. 시스템 조립 전에 모든 부품은 철저히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미리 탈기체시키며 소재표면에 치밀한 산화피막이나 질화피막을 형성, 벌크로부터 수소가 확산됨을 방지한다. 극초진공 측정용으로 특별 디자인되어 상품화된 이온게이지로 측정할 수 있는 압력은 ㎩대가 최하다. 레이저를 활용하는 방법도 일본에서 연구중이나 아직 성공하지는 못했다.
여섯째, 부분압 및 초청정진공이다. 과거 진공기술은 주로 전체압력을 가능한 한 낮추는 데만 치중했는데 현재는 각종 첨단부품의 광학적·전기적 특성이 진공의 조성에 따라 크게 변하며 특히 기가급 반도체소자에서는 웨이퍼 위의 원치 않는 분자 한개 한개가 소자의 성능을 저하시키는 상황이므로 초청정진공이 요구된다. 부분압 측정기들은 일종의 질량분석기다. 기체분자를 이온화시킨 후 자장 또는 사중극자를 이용한 이온분류기에서 질량별로 분류한 후에 이온수집기에서 적당한 방법으로 모아 측정해서 부분압을 결정한다. 부분압 측정은 공정가스의 양 및 조성을 정확히 제어해야 할 필요성에서, 또 첨단소자의 불순물제어의 측면에서 최근 그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올해 삼성전자가 반도체시설에 12억 달러, LGLCD가 4세대 LCD시설에 1조원 정도를 투자할 것이라고 한다. 반도체 및 LCD설비의 3분의 1 정도는 진공장비다. 타회사들의 설비투자, 전자 및 기계 산업용으로 국내의 진공장비 시장은 금년 한해만 약 5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진공산업은 국내시장의 10 % 미만, 그것도 저급장비 시장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진공장비들의 특성은 많은 분야의 기술이 집약돼 형성되고 주요 구성부품들은 전문화되어 전문생산업체에서 제조해야 된다. 세계적인 진공장비업체도 자체에서 조달하는 구성부품비율은 25% 미만이다. 진공산업은 초기투자가 많이 들고 발전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에 국가의 정책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제품 생산업체가 장비업체를 그리고 장비업체가 다시 구성부품 생산업체를 사업파트너로 이끌어 가는 계열화가 필요하다.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제품기술의 세계적 우위를 계속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정의 지속적 개발과 이를 받쳐줄 수 있는 장비기술의 확보가 필요함을 느끼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반도체장비 국산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몇개 업체가 CVD, 애셔(Asher) 등의 몇개의 진공 공정장비를 양산용으로 납품했다. 지금도 여러 업체가 반도체 및 평판 디스플레이 및 기타 양산장비의 개발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많은 기업 및 출연연구소 출신들이 벤처기업을 설립, 활발하게 연구개발하고 있어 국산 양산장비가 하나 둘씩 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들 국산장비는 국산부품이 아직 하나도 없다. 장비업체들은 구성부품 전부를 외국산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비개발의 자유도가 줄어들고 경제적·시간적 손실이 많은 만큼 구성부품의 국산화가 절실하다.
정부는 이같은 난관 극복을 위해 「진공기술기반구축」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으로 공동연구시설이 구축되면 진공특성평가사업, 개방실험실사업, 교육 및 정보사업을 통해 장비업체와 구성부품 생산업체 사이에서 생산업체를 끌어올려 품질을 향상시키고 장비업체 측에는 구성부품의 품질을 평가 보장해 주어 사용을 권장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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