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다드 시대. 이제 기업도 글로벌 마켓을 개척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 남을 수 없는 때가 됐다. 가전업체들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미국의 선진 가전업체들을 비롯, 중국·동남아 중소기업들조차 다국화의 길을 걸으면서 너도나도 경쟁력 향상에 발벗고 나섰다. 현재 한국의 가전산업은 위기에 서 있다. 특히 중소가전업체들을 위주로 한 소형가전산업은 최근 가전 3사와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방식의 거래가 중단되면서 큰 위기를 맞고 있다. 한마디로 주저 앉느냐, 살아 남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다. 지난달 말 독일 쾰른에서 열린 가전 전시회 「도모테크니카 99」 및 유럽의 소형가전 전문업체들의 현지 취재를 통해 국내 소형가전산업의 상황 및 문제점, 대안 등을 3회에 걸쳐 조망해 본다.
<편집자>
「단위생산량 1억개와 1만개.」
이것은 필립스가 전 세계 80여개의 공장에서 하루 동안 생산하는 전기면도기의 개수와 국내 중소업체들의 전기면도기 일일 생산량을 모두 합친 숫자다.
대다수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니냐고 한결같이 지적한다. 가내 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는 국내 중소가전업체들이 글로벌 생산을 기반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들과 어떻게 맞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국내 중소가전업체들 중 소형가전제품을 하루에 1만대 이상 생산하는 업체들은 단 한 군데도 없다. 팔리지 않아 못 만들고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생산구조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악순환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가전업계의 많은 관계자들은 『국내 소형가전산업이 이같은 영세한 구조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OEM방식에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국내 소형가전산업은 50년대 말 전기면도기·전기다리미 등 군수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가전3사가 대리점 체제를 구축하면서 집객률을 높이고 신규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소형가전제품들을 중소업체들과 OEM형태로 개발하기 시작한 70년대 말부터다.
대다수 기술개발은 가전 3사가 맡고 중소업체들은 다품종 소량생산을 기반으로 가전 3사가 필요로 하는 소형가전제품들을 주문량에 맞춰 계획 생산했다. 이같은 생산과정을 약 20년 동안 지속해 온 셈이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유통시장이 개방되자 필립스·브라운·내셔널 등 외국 가전업체들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이들에게 시장을 뺏긴 가전 3사는 수익성 악화를 내세워 9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동안 OEM방식으로 거래해오던 중소업체들과 관계를 단절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중소업체들이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OEM에 의존하는 동안 독자적인 판로나 영업능력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상품기획 및 마케팅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브랜드 인지도도 전무하다 보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현재 국내 소형가전산업은 기로에 서 있다. 외국 업체들에게 시장을 내주고 물러나느냐, 아니면 독자적인 회생길을 찾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중소가전업체들이 갈 길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번 독일 도모테크니카전시회는 이같은 국내 업체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좋은 사례다.
터키를 본국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인 베코사의 경우 중소 가전업체들의 컨소시엄으로 구성된 소형가전 전문기업이다. 이 업체는 컨소시엄에 참여한 중소기업들이 각자의 전문 품목을 생산한 뒤 공동브랜드를 붙여 공동 영업망을 통해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다. 마케팅 능력도 여느 대기업 못지 않다. 전시회에서도 독특한 디자인과 기술력, 영업력을 발휘해 차세대 기업으로 주목받았다.
중국 중소가전업체들도 우리 업체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본보기다. 그동안 전세계 유수 가전업체들의 생산공장 역할을 해왔던 중국 가전업체들은 단순 OEM에 머물지 않고 중국 가전제품생산협회(CHEAA:China Household Electrical Appliance Association)를 만들어 공동 마케팅으로 세계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들은 해외 각종 전시회에 국가관을 만들어 해외 바이어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능력과 중국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가전업계 관계자들도 『국내 중소가전업체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영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같은 조직적인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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