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45)

제7부 격동의 시대-슈퍼컴시대의 개막 (9)

국내에서 슈퍼컴퓨터시대가 열린 것은 서울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88년 말이다. 이 해 12월 6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시스템공학센터(SERI)에서는 과기처 장관 이상희(李祥羲·한나라당 의원), 청와대 경제비서관 홍성원(洪性源·시스코시스템스 사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슈퍼컴퓨터 「크레이(Cray) 2S」의 가동식이 거행됐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에서 슈퍼컴퓨터가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83년 슈퍼컴퓨터 도입에 대한 SERI 보고서가 과기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은 지 만 5년 만에 이뤄진 쾌거였다.

 「크레이 2S」의 도입은 서울올림픽 전산화 성공과 함께 88년 국내 전자산업계 10대 뉴스로 선정될 만큼 빅뉴스거리였다. 「크레이 2S」는 초당 20억번의 부동소수점 처리능력(2기가 FLOPS)을 가진, 당대 최고 성능의 컴퓨터였다. 중앙연산처리장치(CPU)가 4개, 1백28MB의 기본메모리, 40GB 용량의 보조기억장치(디스크) 등을 포함하는 「크레이 2S」는 당시 초대형컴퓨터 분야에서 명성을 날렸던 컨트롤데이터(CDC)·IBM·유니시스·후지쯔·NEC 등의 최상급 기종들에 비해 가격과 사양 면에서 3∼4배 이상 앞서는 것이었다.

 80년대 중반 슈퍼컴퓨터는 이미 선진국에서 기상예보·원자력안전성 분석·석유탐사·극한실험·기초과학연구 등 일반 컴퓨터로는 접근이 어려운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85년경 세계에는 1백여대의 슈퍼컴퓨터가 설치돼 있는데 이 가운데 70%가 미국에, 나머지 30%도 유럽과 일본에 집중돼 있었다. 그러나 멀지않아 올림픽을 치를 한국은 단 한대의 슈퍼컴퓨터 도입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67년 KIST 전산실 실장 취임 이후 적어도 컴퓨터처리 분야에서만큼은 안해본 것이 없었던 성기수로서는 늘 이것이 안타까웠다. 슈퍼컴퓨터는 정보처리산업보다는 오히려 학문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였다.

 성기수가 본격적으로 슈퍼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83년부터였다. 한국에는 단 한대도 없는 슈퍼컴퓨터가 미네소타대학교나 교토대학교 등에서 이미 대학 단위로 설치돼 운영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부터 성기수는 중앙 일간지와 전문지 등에 슈퍼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하면서 여론조성을 꾀하는 한편 과기처 관리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과기처는 84년의 예산편성에서 슈퍼컴퓨터 도입예산을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예산 배정권을 가진 경제기획원을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비싼 기계를 들여오느냐』라는 것이 기획원측의 답변이었다.

 성기수의 노력이 매번 수포로 돌아가게 된 데에는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해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청와대의 무관심도 한몫을 했다. 당시 대통령 경제비서관 홍성원은 83년 「정보산업의 해」를 맞이하여 정보산업육성위원회 등의 조직을 발족시키고 컴퓨터 특히 PC산업 육성을 적극 밀어붙이고 있던 때였다. 홍성원은 자나깨나 향후 국내 정보산업 발전방향에 대해 『PC의 국산화와 보급에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85년 성기수는 일본 이토추상사(伊藤忠商社) 계열의 민간연구소인 센추리연구소(CRC)와 과학기술 정보교환 협정을 체결하고 이 해부터 CRC가 보유하고 있던 「크레이 X-MP」 슈퍼컴퓨터의 컴퓨팅파워를 SERI를 통해 국내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일종의 「맛뵈기」 또는 여론 환기용 처방이었다.

 이런 성기수의 노력에 부응하여 SERI는 86년 과기처 기술정책실장 최영환(崔永煥·전 과기처 차관, 현 철도대학장)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7백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 연구비는 SERI연구원 출신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안문석(安文錫·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에 지급되어 「슈퍼컴퓨터 도입의 경제적 타당성 분석연구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 보고서는 슈퍼컴퓨터의 도입 타당성을 경제적 안목에서 연구분석한 최초의 것이었다. 이 보고서에서 안문석은 학계·연구소·산업계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적어도 한대의 슈퍼컴퓨터 도입 필요성을 도출해 냈다.

 정부가 슈퍼컴퓨터 도입에 반응을 보인 것은 87년이었다. 정부가 의외로 빨리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아닌 미국의 통상압력 때문이었다. 한국은 85년 8억5천만달러의 무역흑자를 시발로 86년 31억3천만달러, 87년에는 62억6천만달러의 흑자가 예상되고 있었다. 더욱이 87년 한해 미국과의 무역거래만을 놓고 볼 때 수출이 1백80억달러인 데 반해 수입은 81억달러에 그쳐 한국은 무려 99억달러의 대미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미국은 무역불균형 시정을 위해 한국정부에 특정분야의 미국제품 구매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슈퍼컴퓨터였다.

슈퍼컴퓨터의 도입규모는 당초 1천만달러대의 중형급 수준이었으나 SERI와 과기처간의 협의과정에서 2천만달러 규모 이상의 초대형으로 확대됐다. 정부측에서 보면 어차피 미국으로부터 일정규모 이상의 제품을 구입해줘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조정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부는 88년도 예산에서 약 1백70억원(2천6백만달러)을 슈퍼컴퓨터 도입예산으로 배정했다. 이 과정에서 성기수는 정부로부터 컴퓨터의 라이프사이클에 따라 슈퍼컴퓨터를 5년마다 새 기종으로 교체할 것도 보장받았다. 88년에 슈퍼컴퓨터 1호기가 도입되면 93년에 2호기, 98년에 3호기 도입을 승인하겠다는 약속이었다.

 87년 말 SERI에 슈퍼컴퓨터도입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위원장은 성기수가 직접 맡았다. 또 슈퍼컴퓨터의 기종선정과 도입과정을 감시할 외부전문가자문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그 위원장에는 KAIST 화학과 교수 전무식(全武植·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이 임명됐다. 88년 초에는 두 위원회를 포함하여 연구계·학계·업계·사용자·정부측에서 33명의 인사를 망라한 슈퍼컴퓨터기종선정위원회가 구성됐다.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 경상현(景商鉉·전 정통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여 성기수·안문석·전무식과 서울대 교수 이동규(李東珪·서울대 대기과학과 교수), 기아산업 전무 이한백(李漢伯·기아자동차 고문), 성균관대 교수 최병호(崔炳鎬·성균관대 토목과 교수), 금성반도체연구소장 강인구(姜麟求·연암공대 학장),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이용태(李龍兌·삼보컴퓨터 명예회장), 청와대 경제비서관 정홍식(鄭弘植·전 정통부 차관),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박성득(朴成得·한국전산원장),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 전윤철(田允喆·공정거래위원장) 등이 이 위원회 멤버였다.

 기종 선정과정에서 크레이리서치(Cray Research)사의 「크레이 2S」와 「크레이 Y-MP」, CDC의 자회사인 ETA시스템스의 「ETA-10」 등 3기종이 도입 물망에 올랐다. 발표된 사양만으로는 신생 「ETA-10」이 월등했으나 시스템 안정성, 응용소프트웨어의 지원, 고객서비스 등에서는 「크레이 2S」와 「크레이 Y-MP」가 앞섰다. 87년 11월 성기수와 김문현(金文鉉·전 SERI 소장), 양영규(梁英奎·ETRI 연구부장) 등 SERI측 슈퍼컴퓨터도입추진위원회 위원들이 2주일 일정으로 크레이사와 ETA시스템스, 그리고 두 회사 제품이 설치돼 있는 레퍼런스사이트를 직접 돌아보고 왔다. 현지에서 「ETA-10」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ETA-10」은 유일하게 플로리다주립대학(FSU)에만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성기수는 현장 견학에서 이 컴퓨터가 실용화 이전단계에서 기약없이 시험운영중인 것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ETA시스템스는 FSU 외에 제품 공급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는데 결국은 2년 후 파산하고 말았다. 성기수가 만일 「ETA-10」을 선택했더라면 두고두고 비난이 쏟아졌을 터였다.

 「ETA-10」을 제외시킨 가운데 크레이사의 두 기종을 놓고 슈퍼컴퓨터기종선정위원회가 내부투표를 한 결과 연구계와 학계는 「크레이 2S」를, 산업계는 「크레이 Y-MP」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성기수가 직접 고안한 벤치마크테스트 프로그램 「SUNG1」과 「SUNG2」가 위력을 발휘했다. 「SUNG」시리즈는 연산속도만 측정하는 기존 벤치마크 프로그램들과 달리 컴퓨터메모리·입출력·처리시간·결과 신뢰성·가격대비 성능 등을 함께 측정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크레이사에서도 체크하지 못했던 「크레이 2S」의 버그를 잡아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88년 초 「SUNG」시리즈는 결국 한국의 슈퍼컴퓨터 도입 1호 기종으로 「크레이 2S」를 낙점했다.

「크레이 2S」는 88년 8월 홍릉단지에 들어와 4개월여 동안 설치작업을 마치고 그해 12월 6일 첫가동에 들어갔다.

 「크레이 2S」는 가동 이듬해인 89년 9월 태풍 「베라」의 진로를 정확하게 예측, 그 존재를 만방에 떨쳤다. 93년까지 중앙기상대의 일기예보 정확성이 78%에서 83%로 향상됐다. 「크레이 2S」는 또한 3차원기반 한반도 지도를 제작함으로써 국토종합개발과 군사전략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신형 국산자동차 설계에도 활용됐다. 항공기 부품설계, B형 간염 예방약 및 항암제 개발, 원자력발전소 안전성 분석 등에서 「크레이 2S」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93년 11월 「크레이 2S」는 자신의 역할을 도입 2호 슈퍼컴퓨터인 「크레이 Y-MP C90」에 넘기고 대덕단지내 SERI 현관 로비의 진열장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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