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권장소비자 가격 표시금지" 재검토를

 정부가 가전제품 등 주요 공산품에 대해 지난 19년간 시행해 온 공장도(수입)가격 표시 의무화 조치를 지난 8월 완전 해제한 데 이어 내년부터는 권장소비자가격까지 표시할 수 없도록 할 계획이라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현재 생산자들이 권장소비자가격을 상품에 표시함으로써 대리점 등 소매점간의 가격경쟁을 제한하고 있는데다 권장소비자가격을 실제 시중가격보다 높게 책정한 뒤 대폭 할인판매하는 것처럼 소비자들을 현혹시키는 문제가 있어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정부는 이른 시일내에 시장조사와 함께 소비자단체들로부터 의견을 수렴해 생산자가 권장소비자가격을 표시할 수 없는 품목을 구체적으로 지정한다는 방침이고, 가전제품을 비롯해 의류·가구·스포츠용품·구두 등 상당수 품목이 이에 해당될 전망이다.

 사실 현행 권장소비자가격 표시제도는 표시가격의 진위 여부가 불분명해 소비자에게 혼란을 초래할 뿐 아니라 소매점간의 가격경쟁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현행 가격표시제도는 소비자들에게 가격정보를 제공해 주고 유통업체의 폭리를 방지하며 나아가 물가안정을 기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제도 자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폐지된 공장도가격의 경우 대부분 상대방과 수량이나 자금결제조건 등 거래조건, 원가계산 시점 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를 출고가와 표시가를 일치시키도록 요구하거나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또 권장소비자가격의 경우 생산자가 임의로 표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에 가격의 과다표시 여부는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산자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생산자단체 등에서 적정가격의 인준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사후에 지나친 과다표시라 해서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제조업자의 과다표시는 일종의 기만이자 사기이므로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적정가격을 표시하도록 한다면 가격표시에 대한 신뢰도를 저하시키는 문제는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최종판매업자에 의한 폭리는 규제해야 하지만 할인판매 등 가격경쟁은 물가안정이나 소비자 보호 차원에서 오히려 제도적으로 유인해 나가야 할 문제라고 본다.

 특히 가전제품에 대한 권장소비자가격 표시를 금지할 경우 가전유통시장에 일대 파란은 물론 가전산업도 엄청난 회오리바람에 휩싸일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현재 가전제품에는 공장도가격에다 20% 내외의 유통마진을 붙여 권장소비자가격을 표시하고 있는데 똑같은 제품이라고 해도 제품의 성능이나 기능 또는 재질·용도 등에 따라 엄청난 가격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가전제품을 가격만 가지고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그러한 특수성이 있는 가전제품에 대해 권장소비자가격을 표시하지 않을 경우 유통업자의 마진이 다양해지고 소비자들의 제품 구입가격도 천차만별이 될 것이며 대도시와 농·어촌, 산간벽지 등에 따른 가격차이는 더욱 큰 폭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는 곧 유통업체간 무한경쟁을 예고하는 한편으로 경영 노하우와 자금력 등에서 앞선 외국의 대형 유통점들이 가전유통시장을 장악할 확률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가전사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는 문제점도 있다. 양판점을 비롯한 대형 유통점의 급부상으로 가격결정권을 잃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전사간의 시장점유 경쟁은 지금보다도 더욱 치열해져 유통시장에 출혈 공급하는 사태가 확산됨으로써 채산성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이밖에도 소형 가전제품과 같이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에 크게 의존해 온 중소가전업계는 더욱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며 이는 곧 국내 가전업계의 내수기반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정부의 가격표시제 개정안이 가전제품에 당장 적용될 경우 가전유통시장과 가전산업이 송두리째 흔들릴 공산이 크다.

 따라서 권장소비자가격 표시를 금지하는 것보다 단위가격표시제 도입 등 가격표시제 자체를 보완함으로써 소매단계에서의 가격경쟁 촉진 및 물가안정을 도모해 나가는 방향으로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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