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무 개념이 무너진다
기술이 바뀌면 패러다임이 변한다.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가름하는 키워드는 디지털이다. 단방향 단편적 아날로그시대의 모든 패러다임은 양방향 복합적 개념의 디지털이 등장하면서 근본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디지털 혁명은 이미 우리 문화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면서 마침내 전통적 역무개념이 가장 확고한 방송에까지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통신업계가 주장하는 디지털시대의 통신방송 융합은 과연 어디까지 왔는지 그 현황과 전망을 4회에 걸쳐 긴급 진단한다.
<편집자>
통신업체들은 요즈음 아우성이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급변하는데 이를 뒷받침해야 할 법적·제도적 장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한다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통합방송법만 해도 그렇다. 통신업계는 논란이 되고 있는 정부의 방송사 및 방송정책 장악과 같은 정치적 문제에는 관심도 없다. 그들이 아우성치는 것은 새로운 방송법이 정치적 시각으로만 조명된 채 정작 21세기 디지털시대에 대비한 기술적 보완문제는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는 현실인식 때문이다.
통신업계에서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역무가 속속 등장하고 이에 따라 기존 역무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미국의 재즈페스티벌을 인터넷 방송국이 전세계에 중계하고 이창호와 조치훈의 국제바둑대회 대국실황도 안방에서 마우스 클릭 한번이면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 인터넷 가상공간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음악방송국들이 등장, 성업중이고 전화선이나 인터넷을 이용해 각종 비디오프로그램을 선택, 제공받을 수 있는 주문형비디오(VOD)는 상용화단계를 넘어섰다. 이들은 모두 통신과 방송의 융합을 배경으로 한 디지털통신이 파생시킨 신세대 업종들이다.
더욱 거대한 조류는 대규모 통신사업자들이 밀고 나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 오늘날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빌 게이츠는 이제 기존 공중파 방송사까지 흡수하고 있다. MSNBC라는 복합방송국을 미국에서 운영하고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케이블TV사업자들은 전송망사업자(NO)라고 불리는 한국통신과 한국전력의 통신망을 활용하고 있다. 이들이 실어내는 콘텐츠는 전통적 의미의 방송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프라는 통신회선이다.
이들을 모두 전통적 방송개념이나 역무로 재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엄청난 규모의 설비투자와 공익성을 앞세워 엄격한 진입·퇴출 장벽을 두고 있는 기존 방송개념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극단적으로는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컴퓨터 하나만 있다면 누구나 방송국을 만들 수도 있고 운용할 수도 있다. 물론 정부의 전파배정 등 일정한 규제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기술추세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제는 통신업체들이 방송 인프라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콘텐츠까지 포함해 전송해주는 뉴미디어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하나로통신·두루넷 등이 가장 적극적이다. 가장 효율성 높은 통신망을 음성전화에만 이용한다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시각이다.
디지털과 네트워크로 특징지워지는 통신업체의 자산은 자연스럽게 방송에까지 다가서고 있다. 통신과 방송을 통해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일반인들이 요구하는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유형의 통신방송 융합서비스가 탄생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의 예로 볼 때 기술혁명은 예측을 불허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통신과 방송의 융합은 더욱 가속될 것이고 우리는 이에 대한 비전과 대책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정보시대에서 산업시대의 옷을 입고 뛸 수는 없다. 통신과 방송의 융합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역무와 기존 개념의 파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통신업체들의 주장이다. 그 해답은 통신방송 융합의 현황을 보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택기자 etyt@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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