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피해 구제제도 개선
9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인 PC가 사무실은 물론 일반 가정으로 급속히 보급되는 것에 힘입어 PC의 핵심부품인 주기판 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은 호황을 누렸다.
특히 PC가 앞으로 TV·VCR 등 일반 가전 제품을 제치고 단일 품목으로는 국내 최대 전자제품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국내 중소 주기판업체들은 앞다퉈 생산설비 확충에 나섰다.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보였던 중소 주기판업체들은 갑자기 예기치 못한 「대만 태풍」을 만나 좌초 위기에 직면했다. 우리보다 기술이 한 수 앞서 있는 데다 가격경쟁력까지 구비한 대만 주기판업체들이 국내 시장을 넘보기 시작하더니 덤핑에 가까운 가격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휩싸인 국내 중소 주기판업체들은 한국전자공업진흥회(현 한국전자산업진흥회)를 통해 대만 주기판업체의 덤핑 수출을 막아 달라는 건의문을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도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해 산업피해조사에 착수, 대만산 주기판에 조정관세를 물리기로 했다.
그런데 조사착수에서 조정관세가 부과될 때까지 거의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갈수록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한 국내 중소 주기판업체들에는 피말리는 기간이었다.
업계가 그토록 갈구하던 조정관세는 부과됐지만 그동안 너무 긴 시간이 걸려 대부분의 중소 주기판업체는 도산했고 일부만 명맥을 유지해 국내 주기판업체의 시장 지배력은 상실됐다. 또 최근엔 이들 기업마저 도산하거나 사업을 포기, 이제 중소 주기판업체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다.
외국업체의 가격 덤핑 등 불공정 수출입 행위를 조사, 시정하기 위해 무역위원회가 중심이 돼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각종 정부 조치가 국내 기업에 효과적인 혜택을 주지 못하고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으로 끝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최근 10여년간 주기판 사업을 하다 손을 뗀 모 사장은 『외국업체의 덤핑 행위는 시일을 다투는 사안인데 정부의 움직임은 소걸음일 정도로 느려 상당수 정부조치는 「사후 약방문」일 때가 많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외국업체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시정하기 위해 국내 중소기업이 대응하기에는 버거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덤핑 등 불공정 행위를 인지하고 시장 조사를 거쳐 정부에 구제신청을 내는데 소요되는 비용이 일개 중소기업이 감당하기에는 힘들다는 것이다. 산업피해 구제신청을 하기까지 5천만원 정도 비용이 들고 사안이 복잡할 경우 1억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라도 소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다면 산업피해구제제도에 희망을 걸어보겠으나 정부의 늑장 대응으로 별 실익이 없이 끝나는 경우가 허다해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업종 전환이나 틈새시장만 유지하는 형태로 경영전략을 수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산업계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산업피해구제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구제 신청부터 판정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산업피해를 입증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정부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게 국내 중소업계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아울러 수입물품에 대한 상세 내역을 데이터베이스화, 이들이 국내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 상시 감시체제 구축도 시급하다고 국내 중소전자부품업계는 역설하고 있다.
<이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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