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격동의 시대-IBM과 제휴 (6)
88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역사적 쾌거를 꼽는다면 어느 상황에서든 빠지지 않을 3개의 「사건」이 있다. 81년 9월 30일 서울이 개최지로 결정된 독일 바덴바덴에서의 낭보, 88년 9월 17일 1백61개국 선수와 임원들이 참가하고 50억 인구가 함께 지켜본 올림픽 개막식, 그리고 「또 하나의 올림픽」이란 찬사를 듣게 된 올림픽전산시스템의 성공적인 개발과 운영 등이 바로 그것이다.
88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은 올림픽경기정보시스템(GIONS)·종합정보망시스템(WINS)·대회관리시스템(SOMS)·대회지원시스템(SOSS) 등 4개 부문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모든 게 다 국내 기술진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이 가운데 SOSS는 올림픽 기간에 숙박·수송·물자·연습장관리 등을 담당한 시스템으로서 한국전산(현 교보정보통신)이 개발을 담당했다. 쌍용컴퓨터(현 쌍용정보통신)가 개발한 SOMS는 SOSS와 연계하여 선수촌·기자촌·입장권·인력·등록·의전 등을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또 WINS는 올림픽에 대한 각종 정보를 검색하기 위한 시스템으로서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이 개발한 것이었다.
GIONS는 각 경기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기결과와 각종 통계(컬러 그래픽)를 현장에서 처리하여 메인프레스센터(MPC)·본부호텔·국제방송센터(IBC)·선수촌·기자촌 등에 배포하는 시스템으로서 88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의 꽃이자, 사실상 전체 시스템의 거의 전부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바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시스템공학센터(SERI)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시스템이었다.
GIONS는 중앙집중처리방식이던 84 LA올림픽 전산시스템(SIJO) 등과는 달리 호스트(IBM 4381) 밑에 경기장마다 중소형시스템(IBM S36) 서버를 둠으로써 호스트 장애에 대비한 분산처리시스템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GIONS는 또한 호스트 업무를 34개 경기장 위주의 47대 서버에 분산시켜 과부하를 해소했고 단위 경기 종목별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최초의 분산형 올림픽전산시스템이었다.
SERI 소장 성기수가 올림픽전산시스템의 국내 개발에 회의적이던 당시 국내외 분위기를 역전시켜 GIONS를 개발하기에 이른 과정은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성공에 이른 기업스토리와 같은 것이었다. SERI가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 의지를 처음 나타낸 것은 바덴바덴의 발표 직후인 81년 11월이었다. SERI를 방문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SLOOC) 사무총장 이원경(李源京·체육부 장관과 외무부 장관 역임)과 성기수 간에 올림픽전산화에 대한 KAIST의 지원을 합의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성기수는 바덴바덴의 낭보가 있은 직후 올림픽전산시스템의 개발이 유사 이래 최고의 전산 프로젝트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우선 SERI 내부적으로 올림픽전산화 관련팀을 구성하고 연구작업에 착수하도록 만반의 채비를 갖추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았다. 즉시 선임연구원 이단형(李檀珩·ETRI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 부장)을 팀장으로 허채만(許採萬·재미), 최정호(崔正鎬·한국통신ICIS개발단 개발1팀장) 등으로 구성된 올림픽전산화 기초조사팀을 가동시켰다. 밖으로는 상부기관인 과기처 관리를 만나 전산화에 관련된 연구를 82년도 이후의 특정연구개발사업에 포함될 수 있도록 직접 설득하고 다녔다.
그러던 차에 이원경이 성기수를 찾아왔다. 이원경의 방문요지는 88 서울올림픽 전산시스템을 국내 기술로 개발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이원경의 방문은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7년 남은 서울올림픽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기 위한 의견 청취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때 성기수는 SERI의 기술로 올림픽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서 반드시 국내에서 개발돼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했다. 나아가서는 외화 절약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초대규모 시스템 개발 경험을 통한 정보산업 발전의 획기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82년 SERI의 올림픽기초조사팀은 「88 서울올림픽의 효율적 추진을 위한 전산화 준비작업 연구」라는 특정연구과제 결과를 내놨다. 이 과제를 통해 SERI는 올림픽전산화의 방향, 국내 보유기술 및 장비의 활용방안, 국가적 차원의 경비절감 등의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한국형 올림픽전산시스템 개발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올림픽조직위원회 전체 마스터플랜에 따른 일정관리와 경기 운영과정 전산화 등을 포함하는 경기운영시스템, 각종 스포츠 경기 데이터베이스 기반의 정보제공시스템, 자료검색과 올림픽조직위원회 전산실 운영을 담당하는 올림픽관리시스템 등 3개의 축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것이 결국은 나중에 GIONS 개발의 골간이 됐다.
기초조사팀은 또한 과기처가 82년도 특정연구과제 비용으로 확보해준 예산을 통해 83년 상반기까지 72년 뮌헨올림픽, 76년 몬트리올올림픽, 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등의 전산시스템에 대한 현지 자료조사에 나섰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가 본격적으로 전산시스템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83년부터였다. 컴퓨터에 대해 문외한들이긴 했지만 조직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때부터 올림픽의 성패가 전산시스템에 달려 있다는 정도의 인식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산시스템을 국내 기술진으로 개발하는 데는 다수가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주요 외국언론들이 대규모 국제행사에 대한 한국측의 경험 부족과 아직도 냉전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과연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섞인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조직위 관계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외부 세계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전산시스템은 LA올림픽용으로 개발되던 SIJO(System Information de Juex Olympique)를 그대로 도입해서 사용하자는 안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조직위 관계자들이 SIJO를 선호하게 된 데에는 이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올림픽 운영을 처음부터 상업적인 시각에서 접근한 최초의 대회가 바로 LA올림픽이었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측이 SIJO를 차기 개최권자인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측에 판매하려는 것도 이같은 전략의 하나였다. SIJO도 사실은 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 개발됐던 시스템을 사들여 E&W라는 회사가 보완한 것이었다.
LA측은 SERI가 SIJO 도입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도입의 성사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측에 대해 LA올림픽과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접근을 차단하고 나섰다. 이런 행위는 전 개최지가 차기 개최지에 대해 기술과 경험을 전수할 것을 의무화한 올림픽헌장까지 무시한 것이기도 했다. 나아가서 LA측은 LA올림픽의 한국내 TV방송중계권료 협상과정을 불리하게 이끌어나가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은 초대 김용식(金溶植·당시 대한적십자사 총재, 95년 작고)에 이어 83년 7월 11일부터 노태우(盧泰愚) 내무부 장관이 맡고 있었다.
취임 후 1주일이 채 안된 어느날 성기수는 과기처 관리와 함께 서울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건물에 있던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처로 노태우 위원장을 방문했다. 이때는 LA측이 정치적 2인자이기도 했던 노태우 위원장에게 직접 SIJO 도입을 강력하게 권유하고 있던 때였다.
성기수는 노태우 위원장 앞에서 우선 SIJO 도입에 대한 불합리성을 설명했다. 우선 몬트리올올림픽을 위해 처음 만들어졌던 SIJO의 골격이 70년대의 낙후된 기술이나 도구에 의해 개발됐다는 점을 지적했다. SIJO의 시스템 규모를 서울올림픽 규모에 맞게 수정해야 하는 데다 한글화 등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오히려 새로 개발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될지 모른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다. 이어 성기수는 독자적인 시스템 개발에 대한 기술적 자신감과 함께 한국의 정보산업 발전이라는 대승적 명분을 결론으로 내세웠다.
노태우 위원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노 위원장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냈다. 83년 10월 전국체전, 그러니까 두 사람 간의 대화 시점에서 불과 한달 앞으로 다가온 제64회 인천체전을 전산화해 봄으로써 SERI의 가능성을 입증해 달라는 요구였다.
따지고 보면 당시 전국체전은 고등학생부와 대학부 그리고 실업부로 나눠 경기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종목수에서만도 최소한 올림픽의 3배에 이르는 초대형 이벤트였다. 더욱이 올림픽의 모든 경기내용과 경기방식은 국제표준에 의해 치러지는 반면 국내 스포츠환경을 중시하는 체전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인천체전의 전산화는 3개월은 커녕 3년이 걸려도 완성될까 말까 한 것이었다. 제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성기수로서도 눈앞이 캄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전권을 쥐고 있는 노태우 위원장 앞에서 못하겠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성기수는 두말없이 인천체전 전산화에 나서겠다고 답하고 노태우 위원장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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