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한알의 밀알이 되어 (40)

제7부 격동의 시대-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4)

정부가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한 83년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에도 여러 가지 정책의 변화를 가져온 해였다. 「정보산업의 해」를 선포한 목적은 크게 대국민 컴퓨터 마인드 확산과 정보산업 육성 등 두 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83년 한해 동안 적지 않은 관련 정책들이 발표되고 컴퓨터 인구 저변확대를 위한 이벤트성 행사들이 기획됐다. 그 가운데 하나가 84년 4월 22일에 본선을 치른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였다. 일반인들의 컴퓨터 운용과 소프트웨어 개발실력을 겨뤘던 이 행사는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2시간여 동안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이날 행사는 공영 텔레비전방송이 스포츠 경기처럼 현장중계를 하여 전국적으로 열기를 고조시켰는가 하면 대통령이 행사장에 들러 직접 참관하기도 했던 초대형 이벤트였다.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는 기획부터 행사진행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산개발센터가 맡아서 했다. 이 행사를 치르는 것을 계기로 전산개발센터는 기관과 기업 등 전문분야의 전산화 작업에서 사회공공부문의 전산화로 영역을 확대하게 됐고 컴퓨터 이용기술의 대량보급과 마인드 확산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를 처음 구상한 사람은 청와대 경제비서실 과학기술담당비서관 홍성원(洪性源·시스코시스템스코리아 사장)이었다. 홍성원은 당시 막 출범했던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의 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정보산업의 해」에 걸맞은 여러 가지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하기 위한 비상설 정부기구였다.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의 출범을 알리면서 대국민 컴퓨터 마인드의 확산과 정보산업 육성의 물꼬를 트기 위한 이벤트성 행사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생각해낸 것이 바로 경진대회였다.

 때마침 정부는 「정보산업의 해」를 맞아 국책과제로 개발된 국산 8비트 퍼스널컴퓨터(PC) 5천대를 2학기부터 각급 학교에 보급키로 하고 온갖 활성화 대책을 강구하던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83년 1월 정부는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83년을 「정보산업의 해」로 선포하고 향후 5년간 정보산업 관련정책의 방향 등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두 달 후인 3월에는 청와대 경제비서실 주도로 「정보산업 육성방안」이라는 문건이 작성돼 대통령에 보고되는데 이는 정부가 체계적으로 정보산업 육성에 나서겠다는 최초의 정책 문건이기도 했다. 이 문건에서는 각종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할 기구의 설치를 건의하고 있는데 이 기구의 명칭은 「정보산업육성위원회」였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원래 홍성원을 위원장으로 하고 과기처 정보계획국장 등 5개 부처 국장급과 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 한국데이타통신(현 데이콤) 사장 이용태(李龍兌·삼보컴퓨터 명예회장),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소장 백영학(白英鶴·ETRI 초빙연구원),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소장 김정덕(金定德·하나로통신 부사장) 등 기관장급을 위원으로 구성키로 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위원장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국장급은 차관급으로 각각 격상됐다. 이렇게 된 것은 과정이나 내용보다는 일의 추진속도 및 성과를 중시하는 대통령의 의사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기구 명칭 역시 정보산업보다는 반도체산업을 더 선호하던 대통령의 뜻에 따라 반도체 및 정보산업육성위원회로 바뀌었다. 다행히도 기관장들의 위원 자격은 유지됐다. 이때 초대 위원장을 맡게 된 이가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83년 작고)이었다. 하지만 외교관 출신인 함병춘은 차관급 위원들이 참석하는 공식회의만 주재했을 뿐 기획이나 실무는 전자공학박사 출신인 홍성원이 도맡아했다.

 이때만 해도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에 대한 홍성원의 구상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에 불과한 것이었다. 추진 계획이나 방법이 구체화한 것도 아닐 뿐더러 예산이 확보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당연히 아이디어에 대해 거부반응들이 잇따랐다. 주판이나 타자기도 아닌데 무슨 기준으로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청와대 명의로 한국과학기술재단 등 여러 곳에 공문을 보냈지만 모두 난색을 표명했다.

전산개발센터 소장 성기수가 생각하기에 컴퓨터를 널리 알리는 방법으로 경진대회만한 행사가 없었다. 성기수는 전산개발센터가 주도적으로 경진대회를 치르겠다고 통보하자 홍성원은 이 행사를 국가 공식행사로 개최하고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예산은 한국전기통신공사와 교육용컴퓨터 개발회사들의 협찬금으로 해결키로 했다.

 성기수의 주도로 전산개발센터가 마련한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 추진계획이 여러 차례의 민간 합동회의를 통해 구체화한 것은 84년 초였다. 대회장은 성기수, 추진위원장은 KBS사장 이원홍(李元洪·송현클럽 회장)이 맡았다. 과기처 정보산업기술국장 김성철(金聖哲), 문교부 보통교육국장 장기옥(張基玉·신성대학 학장), 전자시보(현 전자신문) 사장 김완희(金玩熙·재미), 중앙일보 사장 이종기(李鍾基·삼성화재 부회장), 한국정보과학회장 조정완(趙廷完·KAIST 교수) 등은 추진위원이 됐다. 교육용컴퓨터 5천대를 나눠 개발한 금성사(현 LG전자) 사장 허신구(許愼九·LG석유화학 창업고문), 동양나이론(현 효성T&C) 사장 배기은(裵基殷·화진인더스트리 회장), 삼보컴퓨터 사장 이윤기(李潤基·엘렉스컴퓨터 회장), 삼성전자 사장 정재은(鄭在恩·웨스틴조선호텔 명예회장), 석영컴퓨터 사장 박찬영(朴燦榮), 스포트라이트컴퓨터(현 한국컴퓨터) 사장 홍국태(洪國泰·한국컴퓨터 미국법인장), 이행전기공업 사장 김종호(金鍾浩), 홍익전자 사장 이길화(李吉和) 등도 추진위원 명단에 포함됐다.

 경진대회는 컴퓨터 교육용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을 널리 공모하는 소프트웨어공모부문과 현장에서 주어진 문제를 베이식 언어 또는 어셈블리 언어를 이용해서 푸는 경시부문으로 나눠 진행됐는데, 행사의 압권은 역시 경시부문이었다.

 경시부문은 전국 13개 시도교육위원회 주관으로 치러지는 예선과 여기서 통과한 사람들이 잠실체육관에 모여 일시에 치르는 본선으로 나뉘었다. 예선은 컴퓨터를 동반한 현장실기 없이 베이식 언어의 이해도, 프로그램의 기본설계, 컴퓨터 기초지식 등을 묻는 4지선다형 필기시험과 서류심사로 치러졌다. 국민학교부·중학교부·고등학교부·일반부·교사부 등으로 나눠 치러진 지역 예선에서 3백명의 본선 진출자가 가려졌다.

 본선을 치르는 4월 22일 아침 잠실체육관 실내 바닥에는 컴퓨터와 컴퓨터용 책걸상이 한 조가 된 3백여 세트의 경시 장비가 설치돼 장관을 이뤘다. 당시로서는 컴퓨터 보급이 매우 미미한 터여서 3백대의 컴퓨터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은 그 자체로도 뉴스거리였다. 체육관 대관일이 본선 당일을 포함해서 이틀밖에 되지 않아 컴퓨터의 설치와 실내장식에 밤을 꼬박 새웠다. 결과적으로는 3백명이 참가하는 본선에 준비 및 운영요원만 2백명이 투입된 대규모 종합행사였다.

 본선 경시문제들은 예컨대 6문제가 출제된 국민학생부의 경우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화면에 COMPUTER라는 영어단어가 전광판처럼 1∼2초 간격으로 한글자씩 왼편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내는 프로그램을 다음 요령으로 작성하라.

 요령:① 3회 왼편으로 이동한 후 화면에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도록 할 것.

PUTERCOM

 ② 매번 화면에 COMPUTER 형태로 나타나면 건반을 통해 하나의 수를 입력하여 그 수가 0이면 프로그램 수행을 끝내고 0이 아니면 계속하도록 할 것.>

응시자들이 제출하는 것은 출제문제에 따라 작성한 프로그램과 원시프로그램을 수록한 플로피디스크, 프로그램 사양 및 조작 설명서, 플로 차트 등이었다. 이에 대해 심사기준은 프로그램의 실용성, 교육적 가치, 컴퓨터 마인드 확산 기여도, 창의성, 프로그램 기법, 정보산업 발전기여도 등이었다.

 제1회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는 성공적이었다. 이 행사는 이후 각급 기관·단체·기업에서 치르는 모든 컴퓨터 경진대회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이 행사를 주도했던 성기수와 이정희(李正熙·ETRI 컴퓨터소프트웨어기술연구소 기술정책실장), 안영경(安英景·핸디소프트 사장), 주혜경(朱蕙景·삼성SDS 이사) 등 전산개발센터 연구원들이 두번씩이나 청와대 오찬에 초대됐을 만큼 이 행사는 그 의미가 컸다.

 전국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는 성기수가 대회장을 역임하며 전산개발센터가 행사를 운영한 6회까지(89년) 5만여명의 참가자 기록을 내는 등 대성황을 이뤘다. 공모와 경시용 컴퓨터 기종 역시 8비트에서 16비트·32비트로 꾸준히 업그레이드돼 이 행사가 80년대 국내 정보산업의 발전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90년부터는 행사 규모가 축소돼 경시부문은 폐지되고 소프트웨어부문만 남아 한국소프트웨어공모전이라는 명칭으로 한국정보처리전문가협회에 의해 94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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