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하면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조선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하려고 하면 남의 종이 된다.」
이는 고종에 의해 김홍집, 정병하 등 친일파 내각이 해체되면서 외무대신(외무부 장관)과 학부대신(교육부 장관) 그리고 농상공부대신서리까지 겸직하게 된 이완용이 1896년 11월 21일, 독립협회 회장의 자격으로 독립문 기공식에 참석해 연설한 내용이다. 이로부터 2년도 채 안된 1898년 7월 17일, 러시아의 강권에 의해 전라도 관찰사로 쫓겨난 이완용은 외국에 나라의 이권을 양여해 막대한 부를 축재했다는 이유로 독립협회에서 제명처분됐다. 1905년 대세를 잡은 일본에 의해 학부대신으로 은둔 8년 만에 정계에 다시 진출한 그는 1910년 8월 22일 일본으로 건너가 단독으로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일주일 뒤 우리나라에서 이를 발표, 왕도 아닌 한 개인에 의해 한 나라가 송두리째 딴 나라에 넘겨지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난 이완용은 죽은 후 이 땅의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지리라는 것을 알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으며, 역시 1926년 68세의 나이로 전라도 익산군에 묻혔다가 증손에 의해 파헤쳐져 화장됐다.
이완용은 독립협회에서 제명당한 이유를 고위관직이 없어 자신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국의 왕비인 민비를 시해해 불태워 죽인 일본의 만행에 격분, 소위 「춘생문사건」을 주도했던 이완용이 8년의 공백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자인 일본의 개로 변신한 것은, 보잘것없던 아비를 떠나 10살 때 당시 세도가의 양자로 입양돼 온갖 양반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이완용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방원은 정도전을 죽이고 왕이 됐으며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이고 왕이 됐다. 이들은 왕이 되고 싶어서 왕이 된 자들이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왕이 된 자들이 아니다.
이후로 줄곧 어려서부터 「이다음에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에 기왕이면 대장이라고 말해야 큰 인물이 된다고 교육받은 우리는 지금 회사를 위하기보다는 과장, 부장, 이사가 되기 위해 일하며 회사야 어떻게 되든 아버지가 사장이면 그 아들이 사장이 된다. 정경유착이 이 나라 경제를 망칠 것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다. 산업기술의 선진화만이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의 생존전략임을 모르는 과학자는 없다. 오늘의 IMF 경제위기를 맞아 우리 사회의 엘리트 중에 이완용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영원한 직장은 없어도 직업은 영원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직업의 귀천이 우리같이 극심한 사회에서 유능한 직공을 엔지니어로 승격시켜주겠다는 사장의 말에 『나는 기술밖에 모르므로 잘할 자신이 없어 싫다』라고 거절한 미국의 어느 반도체회사 직공의 말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의 경제대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애국심은 고사하고라도 자기 맡은 바 일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히 요구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 참는 우리네 정서 속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 탄생될 리 없다.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없어서가 아닐진대 하루빨리 이들을 발굴해 이순신, 유관순 그리고 안창호 같은 영웅적 인물로 키워나가는 데 우리 모두가 인색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완용 같은 자가 자꾸 큰소리 치게 된다.
<주승기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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